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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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호주 대륙의 최초 거주민으로,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여러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수만 년 전부터 호주에 거주해 왔으며, 유럽인 정착 이전에는 수렵과 채집을 통해 생활했다. 1788년 영국 식민지화 이후, 원주민은 질병, 학살, 토지 몰수, 강제 이주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20세기에는 '도둑맞은 세대' 정책으로 원주민 아동이 백인 가정에 강제로 입양되기도 했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호주 인구의 약 3.3%를 차지하며, 건강, 교육, 고용 등 여러 사회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정부는 '격차 해소' 전략을 통해 원주민의 삶을 개선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원주민의 문화와 권리를 인정하고 화해를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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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그룹 명칭 |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 |
인구 | 812,728명 (2021년 오스트레일리아 인구 조사) |
인구 비율 | 오스트레일리아 인구의 3.2% |
주요 언어 | 대부분 영어 (오스트레일리아 영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영어, 소수 토레스 해협 영어) 소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언어 (역사적으로), 토레스 해협 크리올, 오스트레일리아 크리올 |
주요 종교 | 기독교 53% 무종교 37%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종교 및 신화 <2% 토레스 해협 섬 주민의 종교와 신화 (역사적으로) |
관련 민족 | 파푸아인 멜라네시아인 |
인구 분포 (주/테리토리별) | |
뉴사우스웨일스 주 | 265,685명 |
퀸즐랜드 주 | 221,276명 |
서오스트레일리아 주 | 100,512명 |
노던 준주 | 74,546명 |
빅토리아 주 | 57,767명 |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주 | 42,265명 |
태즈메이니아 주 | 28,537명 |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 | 7,513명 |
뉴질랜드 | 795명 |
역사 | |
최초 정착 시기 | 약 65,000년 전 이상 |
기타 | |
참고 | "원주민" 또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라는 용어는 너무 포괄적이거나 비인간적이라고 여겨져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용이 권장되지 않음.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기원에 대한 더 구체적인 용어를 선호하거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이라는 용어를 선호함. |
2. 용어
호주 원주민을 지칭하는 현대적인 용어는 여러 가지가 있다. 1789년부터 호주에서 호주 원주민을 묘사하는 데 'aboriginal'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이 단어는 대문자로 표기되어 호주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 모두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토레스 해협 섬 주민은 이 용어에 포함되지 않으며, "Aborigine"( "Aboriginal"과 대조적으로)라는 용어는 식민지 시대의 함의를 지닌다고 여겨져 선호되지 않는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지금으로부터 약 4만~7만 년 전에 호주 대륙에 처음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공통된 특징도 있지만, 각기 고유한 문화, 관습, 언어를 가진 다양한 공동체와 사회를 이루며 살아왔다. 유럽인이 정착했을 당시 원주민은 대략 250개의 언어를 사용했으나, 현재는 120-145개의 원주민 언어만 남아 있으며, 그 중 13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멸 위기에 놓여 있다.
1850년대 식민지화가 안정되자 애버리지니의 삶은 이주민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수렵 생활을 하던 원주민은 정착 생활을 시작했고, 광산 개발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음식을 받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약 1,200여 명의 애버리지니가 군 복무를 했고, 애버리지니의 군 복무 제한 정책이 완화되었다.[20]
"Indigenous Australians"라는 용어는 1980년대 이후 인기를 얻었지만, 많은 호주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들은 이 용어가 너무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고유한 씨족 및 민족 정체성을 제거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용어가 유용하고 편리하며 적절한 경우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몇 년 동안 "First Nations", "First Peoples", "First Australians"와 같은 용어들이 더욱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언어 그룹(아렌테족과 같이) 또는 지리적 지역과 관련된 지명어(누가족과 같이)를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명명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자 가장 존중하는 방법으로 간주된다.
초기 정착 이후 유럽 식민 주민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을 가리켜 "Black"(블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용어는 원래 피부색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종종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원주민 유산이나 문화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1970년대, 원주민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게리 폴리(Gary Foley)와 같은 지도자들은 "Black"이라는 용어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상당수의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주민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을 가리켜 "Blackfella"(블랙펠라) 및 관련 형태의 용어를 사용한다.
"블랙(blak)"이라는 용어는 때때로 더 넓은 사회 운동의 일부로 사용된다. 이 용어는 1991년 사진작가이자 멀티미디어 아티스트인 데스티니 디컨(Destiny Deacon)이 "블랙 릭 미(Blak lik mi)"라는 제목의 전시회에서 처음 사용했다. 디컨은 "블랙(black)"에서 'c'를 제거하여 "'흑인 욕설(cunt)'라는 용어의 무기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식민자들의 언어를 차용하여 뒤집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1세기 현대 원주민 예술은 때때로 블랙(Blak) 예술 운동으로 불린다.
1983년 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은 원주민 또는 토레스 해협 섬 주민을 "원주민 또는 토레스 해협 섬 주민 혈통을 가진 사람으로서 원주민 또는 토레스 해협 섬 주민으로서 자신을 확인하고 그가 또는 그녀가 사는 지역 사회에서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3. 유럽인 접촉 이전
유럽인 정착 당시 원주민 인구는 적게는 31만 8천 명에서 많게는 100만 명으로 추산되며, 머리강을 중심으로 호주 동남부에 가장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지역의 원주민들은 채집과 수렵 채집을 하며 식량을 구했고,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반유목적인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영구적인 정착지와 농업이 존재하기도 했다. 머레이 강 유역에서는 나무껍질로 만든 카누가 사용되었다.
호주 북부 해안을 따라 파스닙 야생마는 야생마의 아랫부분을 땅에 붙인 채 남겨두어 같은 장소에서 다시 자라도록 수확했다. 원주민들은 토양의 영양분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화전을 사용했고, 의도적으로 씨앗을 교환하여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곳에서 식물을 재배하기도 했다. 노먼 틴들은 원주민 곡물대를 그리기도 했다.
토마스 미첼은 브레워리나의 달링 강에 있는 큰 돌로 된 어장을 기록했는데, 각 어장은 연못을 덮고 작은 입구를 통해 물고기를 몰아넣은 다음 나중에 막았다.
유럽인과 접촉하기 전 원주민들은 무기, 도구, 숙소, 수상 운송 수단, 메시지 스틱등을 사용했다. 무기에는 부메랑, 창, 곤봉, 도끼 등이 있었다. 석기 시대 도구에는 칼, 갈는 도구, 식기 등이 있었고, 섬유공예가 발달하여 섬유 그물, 바구니, 가방은 낚시, 사냥, 액체 운반에 사용되었다. 숙소는 지역에 따라 다양했으며, 험피, 구냐 또는 워리로 알려진 나무껍질 텐트나 비탈도 있었다. 의류에는 남동부의 주머니쥐 가죽 망토, 남서부의 부카 망토 및 북동부의 리지(진주 조개)가 포함되었다.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에 호주 북부의 일부 원주민 인구가 인도네시아의 마카사르 어부들과 정기적으로 무역했다는 증거가 있다.
최초의 유럽인 접촉 당시, 1788년 이전 인구는 일반적으로 314,000명으로 추산되지만,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은 500,000~750,000명의 인구가 유지될 수 있었음을 시사하며, 최대 100만 명 또는 200만 명의 인구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추산하는 학자들도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500년 전 원주민 인구는 120만 명을 넘었지만, 유라시아에서 유입된 질병 병원체의 영향으로 다소 감소했을 수 있다. 인구는 250개의 개별 국가로 나뉘었고, 각 국가 내에는 5~6개에서 30~40개까지의 씨족이 존재했다. 각 국가는 자체 언어를 가지고 있었고, 일부 국가는 여러 개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퀸즐랜드 주가 현재 차지하고 있는 호주 대륙 지역이 접촉 이전 호주의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었다는 증거가 있다.주/지역 인구 점유율 추정치 전통적인
부족 땅1930 1988 퀸즐랜드 38.2% 37.9% 34.2% 서호주 19.7% 20.2% 22.1% 노던테리토리 15.9% 12.6% 17.2% 뉴사우스웨일스 15.3% 18.9% 10.3% 빅토리아 4.8% 5.7% 5.7% 남호주 4.8% 4.0% 8.6% 타스마니아 1.4% 0.6% 2.0%
4. 영국인 정착 이후
1920년대에는 애버리지니 인구가 급감하여 절멸 위기감이 높아졌으나, 1930년대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을 갖춘 원주민들의 출생률이 높아져 인구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1900년부터 1972년까지 약 70여 년간 호주 정부와 교회는 원주민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원주민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하여 백인 가정에 입양시켰다. 이들을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 또는 '도둑맞은 아이들'(Stolen Children)이라고 부르며,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을 앓기도 하여 일부는 법정 소송을 통해 2007년 9월 1일 호주 역사상 최초로 보상 결정이 내려졌다.[20] 존 하워드 정권은 이전 정권의 일이라는 이유로 사과나 보상에 소극적이었으나, 2007년 총선에서 승리한 케빈 러드 행정부는 2008년 2월 13일, 범정부 차원의 첫 번째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연방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등 적극적인 과거사 사죄 활동을 시작했다.[20]
2019년 5월, 스콧 모리슨 총리는 제2 모리슨 내각의 내각 직책으로 원주민 호주인 담당 장관직을 신설하고 켄 와이엇을 초대 장관으로 임명했다. 2019년 10월 30일, 와이엇 장관은 의회에 원주민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공동 설계 프로세스"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고위 자문 그룹은 캔버라 대학교 총장인 톰 칼마 교수와 멜버른 대학교 부총장인 마시아 랭턴 교수가 공동 의장을 맡았으며, 전국 각지의 20명의 지도자와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4. 1. 현대
1850년대 식민지화가 안정되자 애버리지니의 삶은 이주민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수렵 생활을 하던 원주민은 정착 생활을 시작했고, 광산 개발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음식을 받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약 1,200여 명의 애버리지니가 군 복무를 했고, 애버리지니의 군 복무 제한 정책이 완화되었다.[20]
1920년대에는 애버리지니 인구가 급감하여 절멸 위기감이 높아졌으나, 1930년대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을 갖춘 원주민들의 출생률이 높아져 인구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1900년부터 1972년까지 약 70여 년간 호주 정부와 교회는 원주민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원주민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하여 백인 가정에 입양시켰다. 이들을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 또는 '도둑맞은 아이들'(Stolen Children)이라고 부르며,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을 앓기도 하여 일부는 법정 소송을 통해 2007년 9월 1일 호주 역사상 최초로 보상 결정이 내려졌다.[20] 존 하워드 정권은 이전 정권의 일이라는 이유로 사과나 보상에 소극적이었으나, 2007년 총선에서 승리한 케빈 러드 행정부는 2008년 2월 13일, 범정부 차원의 첫 번째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연방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등 적극적인 과거사 사죄 활동을 시작했다.[20]
2019년 5월, 스콧 모리슨 총리는 제2 모리슨 내각의 내각 직책으로 원주민 호주인 담당 장관직을 신설하고 켄 와이엇을 초대 장관으로 임명했다. 2019년 10월 30일, 와이엇 장관은 의회에 원주민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공동 설계 프로세스"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고위 자문 그룹은 캔버라 대학교 총장인 톰 칼마 교수와 멜버른 대학교 부총장인 마시아 랭턴 교수가 공동 의장을 맡았으며, 전국 각지의 20명의 지도자와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5. 인구
2016년 기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798,365명으로 호주 인구의 약 3.3%를 차지한다. 2011년 인구조사에서 495,757명은 호주 원주민(어보리진), 31,407명은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 21,206명은 양쪽에 모두 속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오늘날에는 호주의 다른 인종들처럼 뉴사우스웨일스주와 퀸즐랜드 주 등 동부 해안에 가장 많이 거주하며 두 주에서 인구의 약 2-5%를 차지한다. 한편 원주민 인구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노던 테리토리로서, 이곳에서 인구의 약 30%가 원주민이다.
오늘날 원주민은 대부분 영어를 구사하나, 음운, 문법, 어휘 면에서 원주민 언어의 영향을 받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영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영국 이주민이 도착하기 전 호주 원주민의 인구는 약 31만 8천 명에서 100만 명으로 다양하게 추산되며, 분포는 현재 호주 인구와 유사하여 대다수가 남동부, 특히 머레이 강을 중심으로 거주했다.
호주 원주민들은 모든 인구 조사에서 집계되었지만, 대략적인 수치에 불과했고 일관되지 않은 정의가 사용되었다. 1967년에 폐지된 헌법 127조는 각 주와 준주 및 전국 인구 통계에서 "원주민(aboriginal natives)"을 제외하였다. 당시 법무장관은 '순혈 원주민'이어야 '원주민(aboriginal native)'으로 간주된다는 법률 자문을 제공하였다. 1967년 이후 토레스 해협 주민들은 별개의 원주민으로 간주되었다.
1968년부터 호주 원주민에 대한 "연방 정부 작업 정의"가 개발되었고 1978년 내각에 의해 승인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원주민 혈통 정의와 달리 혈통, 자기 확인 및 공동체 인정 요소를 포함한다.
호주 인구 조사에는 개인의 원주민, 토레스 해협 주민 또는 두 출신 모두로의 자기 확인과 관련된 질문을 기반으로 한 집계가 포함된다.
2006년 오스트레일리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1996년 28만 3천 명이었던 원주민 인구는 51만 7천 명으로 증가하여 전체 인구 증가율의 두 배에 달했다. 2016년 인구 조사에서는 2011년 수치보다 18.4% 증가하여 59만 56명이 원주민으로, 3만 2345명이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으로, 그리고 2만 6767명이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 모두로 자신을 식별했다. 2021년 오스트레일리아 인구 조사에서는 81만 2천 명이 원주민 및/또는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으로 식별되어 전체 인구의 3.2%를 차지했다.
2016년까지의 성장은 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주요 도시와 동부 해안을 따라 이루어졌다. 증가의 요인 중 일부는 원주민 여성의 높은 출산율, 이주를 통한 인구 유입, 인구 조사 범위 및 응답률의 차이, 인구 조사 연도 사이에 자신을 식별하는 방식의 변화 등이 있었다. 또 다른 요인은 혼혈 결혼의 자녀일 수 있다. 2016년 인구 조사에서 비원주민 배우자와 결혼(사실혼 또는 법률상의 결혼 포함)한 원주민 성인의 비율은 78.2%로 증가했다.
인구조사 | 인구 | 비율 |
---|---|---|
1971 | 115,953 | 0.9% |
1976 | 160,915 | 1.2% |
1981 | 159,897 | 1.1% |
1986 | 206,104 | 1.5% |
1991 | 265,378 | 1.6% |
1996 | 352,970 | 2.0% |
2006 | 455,028 | 2.2% |
2011 | 548,368 | 2.5% |
2016년 | 649,171 | 2.7% |
2021년 | 812,728 | 3.2% |
6. 역사
20세기 이후로 여러 개인과 단체들이 호주 원주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대표성, 토지 권리 및 기타 정치적 문제에 대한 투쟁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일으켰다.
- 1937년: 요르타 요르타족(Yorta Yorta) 출신 윌리엄 쿠퍼(William Cooper (Aboriginal Australian))가 연방 의회에서 호주 원주민들의 대표성을 요구하는 청원서에 1800명의 서명을 받는다.
- 1938년 1월 26일 (호주 원주민의 날) : 호주 원주민 진보 협회(Aborigines Progressive Association)가 150년간의 무관심한 대우와 토지 몰수에 항의하는 애도의 날을 개최한다.
=== 오스트레일리아로의 이주 ===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인류 정착지는 약 49,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의 바위 그늘인 마제드베베(Madjedbebe)에서 돌 유물 주변 퇴적물에 대한 루미네선스 연대 측정은 65,000년 전의 인류 활동을 나타낸다. 유전자 연구는 50,000~70,000년 전 도착 날짜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견된 가장 초기의 해부학적으로 현생 인류 유골은 멍고인(Mungo Man)의 유골이며, 42,000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 ''레이크 멍고 3''(LM3)으로 알려진 골격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고대 및 현대 원주민의 DNA와 비교한 초기 연구 결과는 멍고인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시사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 결과는 과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립적인 검증이 없었고, 결과가 사후 변형과 DNA의 열적 분해 때문일 수 있다는 제안이 있었기 때문에 해당 염기서열 분석 결과가 비판받았다. 논란이 되는 연구 결과는 멍고인이 현대 인류의 가장 최근 공통 조상 이전에 갈라진 멸종된 아종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지만, 멍고 국립공원(Mungo National Park)의 관리 기관은 현재 지역 원주민이 레이크 멍고(Lake Mungo) 유골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원주민 수호자들이 더 이상의 침습적인 조사를 허용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독립적인 DNA 검사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원주민들은 대륙으로의 단일 이주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며, 동아시아인의 조상과 갈라진 사람들이라고 여겨진다.
최근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 결과에 따르면 관찰된 유전적 다양성을 생성하는 창시자 집단은 1,000~3,000명의 여성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대륙의 초기 식민화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의도적인 조직적인 항해가 필요했음"을 시사한다. 원주민들은 현재 멸종된 오스트레일리아 메가파우나(Australian megafauna)와 같은 환경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숯과 유물 분석에서 얻은 일부 증거는 6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류 사용을 보여준다. 루미네선스 연대 측정은 아넘랜드(Arnhem Land)에서 60,000년 전까지 거주했음을 시사한다. 빅토리아 남서부의 화재 증거는 "12만 년 전 오스트레일리아에 인류가 존재했음"을 시사하지만,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인도네시아 제도와 뉴기니에서 호주 본토로 사람들이 이주한 것은 약 7만 년 전으로 추정되지만, 2020년 기준으로 토레스 해협에 인간이 정착한 증거는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약 2500년 전의 유물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 유전학 ===
유전자 연구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주로 초기 상부 구석기 시대 동안 동아시아인 집단의 이동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멜라네시아인과 같은 다른 오세아니아 사람들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또한 네그리토 또는 고대 남아시아 조상 집단(예: 안다만 제도 원주민)과 동아시아인과 같은 다른 오스트랄라시아 집단과의 유연성을 보여준다. 계통 발생 데이터는 초기 동부 비아프리카(ENA) 또는 동아시아 메타 집단이 삼지창처럼 갈라져 오스트랄라시아인(오세아니아인), 고대 남아시아 조상, 안다만 제도 원주민 및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을 포함한 동아시아/동남아시아 계통을 낳았음을 시사하지만, 파푸아인은 약 2% 정도 더 이른 집단(xOOA)에서 유전자 흐름을 받았을 수도 있다. 사훌 지역의 추가적인 고대 혼합 외에.
Rasmussen 외 2011년 연구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아시아인에 비해 유럽 대립 유전자의 비율이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는 다중 분산 모델의 지표라고 믿는다. 유전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멜라네시아인과 파푸아인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McEvoy 외 2010년 연구는 고대 남아시아 조상 혼합 또는 최근 유럽의 영향을 나타낼 수 있는 또 다른 구성 요소가 있다고 믿었다. 연구에 따르면, 아시아 대륙에서의 후기 이주로 인해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 개체군 사이의 격리가 있었던 단일 창시 사훌 집단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 이주는 약 4,000~5,000년 전에 딩고를 도입했을 수 있다. 이 연구는 또한 약 32,000년 전에 뉴기니의 파푸아인과 필리핀의 마만와족으로부터 갈라져 나왔으며, 약 5,000년 전에 빠른 인구 증가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2011년 유전자 연구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파푸아인 및 마만와인이 아시아의 데니소바인과 관련된 일부 대립 유전자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발견했는데(아시아 대륙의 인구에서는 발견되지 않음), 이는 오스트레일리아가 뉴기니와 분리되기 전인 약 44,000년 전에 아시아에서 현생 인류와 고대 인류가 교배되었음을 시사한다. 2012년 논문은 4천 년 전 조금 넘는 시점에 인도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북부로의 상당한 유전자 흐름의 증거를 보고하는데, 이 시기는 오스트레일리아 고고학 기록에 도구 기술과 식품 가공의 변화가 나타나는 시기이며, 이러한 변화가 관련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Mallick 외 2016년과 Mark Lipson 외 2017년 연구는 동아시아인과 서아시아인의 분기가 최소 4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오스트랄라시아인이 동아시아 계통 내에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남성은 최고 추정치가 60.2%에서 68.7%에 이르는 높은 빈도로 해프로그룹 C-M347을 가지고 있다. 또한, 매우 오래된 해프로그룹 K2의 기저 형태인 K2*(K-M526) – 그 하위 계통인 해프로그룹 R, 해프로그룹 Q, 해프로그룹 M 및 해프로그룹 S는 대부분의 유럽인, 북부 남아시아인, 아메리카 원주민 및 오세아니아 원주민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 는 오늘날 살아있는 인간 중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게서만 발견되었다. 그들 중 27%는 K2*를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남성의 약 29%는 K2b1 즉, M 및 S의 하위 계통에 속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mtDNA 해프로그룹 M과 해프로그룹 N의 깊이 뿌리내린 계통을 가지고 있다.
=== 영국 식민지화 ===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 동남부 지역을 대영제국 영토로 선포하고 뉴사우스웨일스라고 이름붙인 이후 1788년 시드니를 중심으로 식민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인 이주로 인한 피해는 학살 및 그들과 같이 들어온 수두, 천연두, 인플루엔자, 홍역과 같은 전염병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없었던 애버리지니는 인구밀도 높은 동남부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큰 타격을 받아 인구가 급감하였고, 또한 이주민과 같이 들어온 성병 감염으로 말미암아 출생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민 초기 31만 5천~75만 명이던 원주민이 급감한 주요인은 천연두, 인플루엔자, 결핵과 같은 질병이며, 이 가운데 천연두에 걸려 병사한 원주민 수만 전 인구의 50%에 달했다고 추정된다.
전염병과 성병, 그리고 탄압으로 말미암아 1788년과 1900년 사이 애보리진 인구 90%가 감소했다. 비교적 풍족했던 남부 호주의 애보리진의 경우 대규모 유럽 정착민들이 채 도달하기도 전에 전염병으로 절멸했다. 태즈메이니아섬은 특히 타격이 컸는데 이주민 정착 초기 2,000~15,000명 수준이었던 애버리지니 인구가 1870년 무렵 거의 사라졌다. 인종학살이 가장 극심했던 1803-34년 사이 333명 애버리지니가 학살당한 것도 직접적 원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주민과 함께 들어온 매독 등 전염병에 저항력이 없었기 때문이며, 대다수는 이러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태즈메이니아 지역의 애버리지니는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30년사이(1803-1833) 영국 이주자들과 함께 들어온 질병과 인종탄압, 학살에 의해 인구가 약 5,000~15,000명에서 300명으로 급감하였다. 1896년 이후로 역사학자와 과학자, 인류학자들에 의해 애보리진에 대한 인구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트루가니니'라는 여성을 마지막으로 순수혈통은 모두 사라졌다.
내륙지방은 원주민이 정착민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여 이민 초기 약 3,000명가량 백인 이주자가 살해당했다고 추정되지만, 백인 이민자가 살해한 원주민의 수 또한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영국 식민지화는 1788년 뉴사우스웨일스주 보타니 베이에 퍼스트 플릿이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타스마니아(1803년), 빅토리아주(1803년), 퀸즐랜드주(1824년), 서호주(1826년), 그리고 남호주 식민지(1836년)에 정착지가 세워졌다.
=== 영향 ===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 동남부 지역을 대영제국 영토로 선포하고 뉴사우스웨일스라고 이름붙인 이후 1788년 시드니를 중심으로 식민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인 이주로 인한 피해는 학살 및 그들과 같이 들어온 수두, 천연두, 인플루엔자, 홍역과 같은 전염병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없었던 애버리지니는 인구밀도 높은 동남부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큰 타격을 받아 인구가 급감하였고, 또한 이주민과 같이 들어온 성병 감염으로 말미암아 출생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민 초기 31만 5천~75만 명이던 원주민이 급감한 주요인은 천연두, 인플루엔자, 결핵과 같은 질병이며, 이 가운데 천연두에 걸려 병사한 원주민 수만 전 인구의 50%에 달했다고 추정된다.
전염병과 성병, 그리고 탄압으로 말미암아 1788년과 1900년 사이 애보리진 인구 90%가 감소했다. 비교적 풍족했던 남부 호주의 애보리진의 경우 대규모 유럽 정착민들이 채 도달하기도 전에 전염병으로 절멸했다. 태즈메이니아섬은 특히 타격이 컸는데 이주민 정착 초기 2,000~15,000명 수준이었던 애버리지니 인구가 1870년 무렵 거의 사라졌다. 인종학살이 가장 극심했던 1803-34년 사이 333명 애버리지니가 학살당한 것도 직접적 원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주민과 함께 들어온 매독 등 전염병에 저항력이 없었기 때문이며, 대다수는 이러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태즈메이니아 지역의 애버리지니는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30년사이(1803-1833) 영국 이주자들과 함께 들어온 질병과 인종탄압, 학살에 의해 인구가 약 5,000~15,000명에서 300명으로 급감하였다. 1896년 이후로 역사학자와 과학자, 인류학자들에 의해 애보리진에 대한 인구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트루가니니'라는 여성을 마지막으로 순수혈통은 모두 사라졌다.
내륙지방은 원주민이 정착민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여 이민 초기 약 3,000명가량 백인 이주자가 살해당했다고 추정되지만, 백인 이민자가 살해한 원주민의 수 또한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질병의 유행, 예컨대 홍역, 천연두, 결핵 등이 즉각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19세기에 천연두는 원주민 사망의 주요 원인이었으며, 1840년대부터 "원주민"에 대한 예방 접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789년 천연두 유행으로 인해 다루그족의 최대 90%가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더욱이, 원주민들은 성병, 특히 매독과 임질에 감염되었다.
영국 식민지화의 또 다른 결과는 토지와 수자원의 유럽인에 의한 몰수였으며, 19세기와 20세기 초반 내내 시골 땅이 양과 소 방목으로 전환되면서 캥거루와 기타 식량 자원이 격감했다. 정착민들은 또한 원주민 여성에 대한 강간과 강제 매춘에도 가담했다.
일부 유럽인들은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 공동체에 살았다.
1834년에는 최초로 기록된 원주민 추적자들의 사용이 있었는데, 그들은 호주 지형을 탐색하고 사람들을 찾는 데 매우 능숙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860년대에는 타즈메이니아 원주민의 두개골이 두개골 얼굴 인류측정학 연구를 위해 국제적으로 특히 많이 찾아졌다. 1876년 사망한 타즈메이니아 원주민인 트루가니니의 유골은 사망 후 2년 만에 타즈메이니아 왕립 학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발굴되어 전시되었다. 원주민의 신체 일부를 매장을 위해 호주로 반환하려는 운동이 계속되고 있으며, 트루가니니의 시신은 1976년에 반환되어 화장되었고, 유골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뿌려졌다.

19세기와 20세기 대부분 동안,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들은 다양한 주 기반 보호법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러한 의회 법률은 원주민 보호관과 원주민 보호 위원회를 임명했는데, 그들의 역할은 호주 원주민들의 삶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임금은 보호관에 의해 통제되었고, 원주민들은 고용에서 비원주민들보다 적은 소득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원주민들이 식민지 개척자들에 의한 노예제의 희생자였으며, 태평양 섬 주민들과 함께 고향에서 납치되어 블랙버딩으로 알려진 관행을 겪었다. 1860년에서 1970년 사이에 보호 정책이라는 명목하에, 12세 어린이를 포함한 사람들이 끔찍한 조건에서 일하는 부동산에서 강제로 일했으며, 대부분은 임금을 받지 못했다. 진주 채취 산업에서 원주민들은 약 5파운드에 매입되었으며, 임신한 원주민 여성은 "폐의 공기 용량이 더 크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귀하게 여겨졌다. 로트네스트 섬의 원주민 전용 감옥에 수감된 원주민 수감자들은 대부분 날조된 혐의로 수감되었으며, 쇠사슬에 묶여 강제 노역을 했다. 1971년, 섬에서 373명의 원주민 남성이 무덤 없는 무덤에 묻힌 채 발견되었다. 2018년 6월까지 전 감옥은 휴가 숙박 시설로 사용되고 있었다.

1810년부터 원주민들은 교회와 국가가 운영하는 선교장으로 이주되었다. 원주민 인구를 격리하고 통제하려는 보호 정책 이후인 1937년, 연방 정부는 동화 정책으로 나아가기로 합의했다. 이 정책들은 "순혈이 아닌" 원주민들을 백인 사회에 통합시켜 "원주민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의 일환으로, 가정에서 강제로 격리되어 백인들에게, 시설이나 양부모 가정에 배치된 아동의 수가 증가했다.
=== 국경 전쟁과 학살 ===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 동남부 지역을 대영제국 영토로 선포하고 뉴사우스웨일스라고 이름붙인 후, 1788년 시드니를 중심으로 식민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인 이주로 인한 피해는 학살 및 그들과 같이 들어온 수두, 천연두, 인플루엔자, 홍역과 같은 전염병에 의한 것이었다. 면역력이 없었던 원주민들은 인구밀도가 높은 동남부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큰 타격을 받아 인구가 급감했고, 성병 감염으로 출생률도 떨어졌다. 이민 초기 31만 5천~75만 명이던 원주민이 급감한 주요인은 천연두, 인플루엔자, 결핵과 같은 질병이며, 천연두로 사망한 원주민은 전체 인구의 50%에 달했다고 추정된다.[6]
전염병, 성병, 탄압으로 1788년과 1900년 사이 원주민 인구의 90%가 감소했다. 남부 호주의 원주민들은 대규모 유럽 정착민들이 도착하기 전에 전염병으로 절멸했다. 태즈메이니아섬은 특히 피해가 컸는데, 이주민 정착 초기 2,000~15,000명 수준이던 원주민 인구가 1870년 무렵 거의 사라졌다. 1803-34년 사이 333명의 원주민이 학살당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주민과 함께 들어온 매독 등 전염병에 대한 저항력이 없었기 때문이다.[6]
태즈메이니아 지역의 원주민은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30년 사이(1803-1833) 영국 이주자들과 함께 들어온 질병과 인종탄압, 학살에 의해 인구가 약 5,000~15,000명에서 300명으로 급감하였다. 1896년 이후로 역사학자와 과학자, 인류학자들에 의해 원주민에 대한 인구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트루가니니'라는 여성을 마지막으로 순수혈통은 모두 사라졌다.[6]
내륙지방은 원주민이 정착민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여 이민 초기 약 3,000명가량 백인 이주자가 살해당했다고 추정되지만, 백인 이민자가 살해한 원주민의 수 또한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6]


식민지화 과정에서 대륙과 섬 전역에서 식민지 개척자들과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들 사이에 많은 갈등과 충돌이 있었다. 퀸즐랜드에서는 원주민들의 살해가 주로 민간인 "사냥" 단체와 정부 관리들이 이끄는 무장 원주민 남성 그룹인 원주민 경찰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들은 총으로 강제로 모집되어 원주민 저항을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의 도착과 함께 시작된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들에 대한 학살은 1930년대까지 계속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뉴캐슬 대학교의 린달 라이언 연구팀은 이러한 학살들을 지도에 표시하고 있다. 2020년 현재까지 약 500곳의 학살 장소를 지도에 표시했으며, 12,361명의 원주민이 사망하고 204명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약 140년 동안 최소 311건의 학살이 발생했다. 사회적 단위의 상당수를 한 번에 잃은 생존자들은 식량을 구하고, 번식하고, 의식 의무를 수행하고, 추가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능력이 줄어들면서 매우 취약해졌다.[6]
국경 전쟁 중 사망자 수를 추산하는 것은 기록 부족과 많은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 학살이 비밀로 유지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어렵다. 국경 전쟁에서 2만 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2000명의 식민지 개척자가 사망했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최소 4만 명의 원주민과 2000~2500명의 정착민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연구에 따르면 퀸즐랜드에서만 최소 6만 5000명의 원주민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6]
특히 태즈메이니아에서의 원주민 사망과 원주민 공동체로부터의 아동 강제 이동이 집단 학살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다. 린달 라이언이 21세기 인문학 센터에서 수행한 연구를 포함하여 원주민 학살 및 처우에 대한 광범위한 역사적 연구가 있었다. 국경 분쟁 데이터베이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정부의 인권 및 평등 기회 위원회(HREOC) 보고서인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 아동의 가족으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국가 조사"가 있다.[6]
인권 및 평등 기회 보고서에서 로널드 윌슨 판사의 분석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의 강제 이동 정책은 본질적으로 집단 학살적이었다. 윌슨은 라파엘 렘킨을 인용하여 집단 학살을 "민족 집단의 삶의 필수적인 기초를 파괴하고 집단 자체를 절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양한 행동의 조정된 계획"으로 정의했다. 그 목적은 "정치적 및 사회적 제도, 문화, 언어, 민족 감정, 종교 및 민족 집단의 경제적 존재의 붕괴, 그러한 집단에 속한 개인의 개인적 안전, 자유, 건강, 존엄성, 심지어 생명의 파괴"였다.[6]
윌슨은 "집단 학살은 실제 물리적 절멸 이외의 다른 수단으로도 저질러질 수 있다. 범죄의 다른 요소가 성립되는 경우, 아동의 강제 이송으로도 집단 학살이 저질러진다."라고 말한다. 그는 "실제 파괴가 발생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집단 학살을 저지르려는 음모와 집단 학살 시도는 모두 범죄이다."라고 지적한다. 또한 윌슨은 "집단 학살 협약 초안 작성 당시의 논의는 여러 목표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행위나 정책이 여전히 집단 학살적일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집단 학살 행위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집단의 계획된 절멸이 반감이나 증오에 의해서만 동기가 부여될 필요가 없다."...그리고 "합리적인 예견성...은 협약의 의도 요소를 확립하기에 충분하다."라고 밝혔다. 그는 "다른 집단으로 원주민 아동을 강제로 이송하여 그들의 문화와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채 무지하게 양육하는 정책은 적어도 1946년 12월 11일부터 구속력 있는 국제법 위반으로 '집단 학살적'이라고 적절하게 규정할 수 있다...이 관행은 거의 25년 동안 더 지속되었다."라고 결론지었다.[6]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원주민에 대한 광범위한 학살을 인정하는 기념물이 거의 없으며, 집단 학살로 묘사하는 기념물은 없다. 그러나 학살은 종종 오스트레일리아인들에 의해 지명으로 기록되었다. 예를 들어 뉴캐슬의 머더링 굴리, 레이크 웨이바의 머더링 크릭, 케언스 근처의 스컬 포켓과 스켈레톤 크릭, 마운트 몰로이 퀸즐랜드 근처의 라이플 크릭, 마운트 카바인 퀸즐랜드 근처의 스컬 라군, 윈튼 퀸즐랜드 근처의 스컬 홀, 배틀 캠프 로드, 로라 퀸즐랜드 동쪽의 레인지와 스테이션, 뉴사우스웨일스의 슬로터하우스 크릭(워털루 크릭) 등이 있다.[6]
=== 정치적 저항 ===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 동남부 지역을 대영제국 영토로 선포하고 뉴 사우스 웨일스라고 이름붙인 이후 1788년 시드니를 중심으로 식민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인 이주로 인한 피해는 학살 및 그들과 같이 들어온 수두, 천연두, 인플루엔자, 홍역과 같은 전염병에 의한 것이었다.
태즈메이니아 지역의 애버리지니는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30년사이(1803-1833) 영국 이주자들과 함께 들어온 질병과 인종탄압, 학살에 의해 인구가 약 5,000~15,000명에서 300명으로 급감하였다.
내륙지방은 원주민이 정착민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여 이민 초기 약 3,000명가량 백인 이주자가 살해당했다고 추정되지만, 백인 이민자가 살해한 원주민의 수 또한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들의 저항은 식민지 개척 시대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 1938년, 100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시드니에서 열린 최초의 호주 국경일 행사 중 하나에 대해 "원주민 회의"를
6. 1. 오스트레일리아로의 이주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인류 정착지는 약 49,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의 바위 그늘인 마제드베베(Madjedbebe)에서 돌 유물 주변 퇴적물에 대한 루미네선스 연대 측정은 65,000년 전의 인류 활동을 나타낸다. 유전자 연구는 50,000~70,000년 전 도착 날짜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견된 가장 초기의 해부학적으로 현생 인류 유골은 멍고인(Mungo Man)의 유골이며, 42,000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 ''레이크 멍고 3''(LM3)으로 알려진 골격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고대 및 현대 원주민의 DNA와 비교한 초기 연구 결과는 멍고인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시사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 결과는 과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립적인 검증이 없었고, 결과가 사후 변형과 DNA의 열적 분해 때문일 수 있다는 제안이 있었기 때문에 해당 염기서열 분석 결과가 비판받았다. 논란이 되는 연구 결과는 멍고인이 현대 인류의 가장 최근 공통 조상 이전에 갈라진 멸종된 아종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지만, 멍고 국립공원(Mungo National Park)의 관리 기관은 현재 지역 원주민이 레이크 멍고(Lake Mungo) 유골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원주민 수호자들이 더 이상의 침습적인 조사를 허용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독립적인 DNA 검사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원주민들은 대륙으로의 단일 이주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며, 동아시아인의 조상과 갈라진 사람들이라고 여겨진다.
최근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 결과에 따르면 관찰된 유전적 다양성을 생성하는 창시자 집단은 1,000~3,000명의 여성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대륙의 초기 식민화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의도적인 조직적인 항해가 필요했음"을 시사한다. 원주민들은 현재 멸종된 오스트레일리아 메가파우나(Australian megafauna)와 같은 환경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숯과 유물 분석에서 얻은 일부 증거는 6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류 사용을 보여준다. 루미네선스 연대 측정은 아넘랜드(Arnhem Land)에서 60,000년 전까지 거주했음을 시사한다. 빅토리아 남서부의 화재 증거는 "12만 년 전 오스트레일리아에 인류가 존재했음"을 시사하지만,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인도네시아 제도와 뉴기니에서 호주 본토로 사람들이 이주한 것은 약 7만 년 전으로 추정되지만, 2020년 기준으로 토레스 해협에 인간이 정착한 증거는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약 2500년 전의 유물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6. 2. 유전학
유전자 연구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주로 초기 상부 구석기 시대 동안 동아시아인 집단의 이동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멜라네시아인과 같은 다른 오세아니아 사람들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또한 네그리토 또는 고대 남아시아 조상 집단(예: 안다만 제도 원주민)과 동아시아인과 같은 다른 오스트랄라시아 집단과의 유연성을 보여준다. 계통 발생 데이터는 초기 동부 비아프리카(ENA) 또는 동아시아 메타 집단이 삼지창처럼 갈라져 오스트랄라시아인(오세아니아인), 고대 남아시아 조상, 안다만 제도 원주민 및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을 포함한 동아시아/동남아시아 계통을 낳았음을 시사하지만, 파푸아인은 약 2% 정도 더 이른 집단(xOOA)에서 유전자 흐름을 받았을 수도 있다. 사훌 지역의 추가적인 고대 혼합 외에.Rasmussen 외 2011년 연구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아시아인에 비해 유럽 대립 유전자의 비율이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는 다중 분산 모델의 지표라고 믿는다. 유전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멜라네시아인과 파푸아인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McEvoy 외 2010년 연구는 고대 남아시아 조상 혼합 또는 최근 유럽의 영향을 나타낼 수 있는 또 다른 구성 요소가 있다고 믿었다. 연구에 따르면, 아시아 대륙에서의 후기 이주로 인해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 개체군 사이의 격리가 있었던 단일 창시 사훌 집단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 이주는 약 4,000~5,000년 전에 딩고를 도입했을 수 있다. 이 연구는 또한 약 32,000년 전에 뉴기니의 파푸아인과 필리핀의 마만와족으로부터 갈라져 나왔으며, 약 5,000년 전에 빠른 인구 증가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2011년 유전자 연구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파푸아인 및 마만와인이 아시아의 데니소바인과 관련된 일부 대립 유전자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발견했는데(아시아 대륙의 인구에서는 발견되지 않음), 이는 오스트레일리아가 뉴기니와 분리되기 전인 약 44,000년 전에 아시아에서 현생 인류와 고대 인류가 교배되었음을 시사한다. 2012년 논문은 4천 년 전 조금 넘는 시점에 인도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북부로의 상당한 유전자 흐름의 증거를 보고하는데, 이 시기는 오스트레일리아 고고학 기록에 도구 기술과 식품 가공의 변화가 나타나는 시기이며, 이러한 변화가 관련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Mallick 외 2016년과 Mark Lipson 외 2017년 연구는 동아시아인과 서아시아인의 분기가 최소 4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오스트랄라시아인이 동아시아 계통 내에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남성은 최고 추정치가 60.2%에서 68.7%에 이르는 높은 빈도로 해프로그룹 C-M347을 가지고 있다. 또한, 매우 오래된 해프로그룹 K2의 기저 형태인 K2*(K-M526) – 그 하위 계통인 해프로그룹 R, 해프로그룹 Q, 해프로그룹 M 및 해프로그룹 S는 대부분의 유럽인, 북부 남아시아인, 아메리카 원주민 및 오세아니아 원주민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 는 오늘날 살아있는 인간 중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게서만 발견되었다. 그들 중 27%는 K2*를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남성의 약 29%는 K2b1 즉, M 및 S의 하위 계통에 속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mtDNA 해프로그룹 M과 해프로그룹 N의 깊이 뿌리내린 계통을 가지고 있다.
6. 3. 영국 식민지화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 동남부 지역을 대영제국 영토로 선포하고 뉴사우스웨일스라고 이름붙인 이후 1788년 시드니를 중심으로 식민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인 이주로 인한 피해는 학살 및 그들과 같이 들어온 수두, 천연두, 인플루엔자, 홍역과 같은 전염병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없었던 애버리지니는 인구밀도 높은 동남부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큰 타격을 받아 인구가 급감하였고, 또한 이주민과 같이 들어온 성병 감염으로 말미암아 출생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민 초기 31만 5천~75만 명이던 원주민이 급감한 주요인은 천연두, 인플루엔자, 결핵과 같은 질병이며, 이 가운데 천연두에 걸려 병사한 원주민 수만 전 인구의 50%에 달했다고 추정된다.전염병과 성병, 그리고 탄압으로 말미암아 1788년과 1900년 사이 애보리진 인구 90%가 감소했다. 비교적 풍족했던 남부 호주의 애보리진의 경우 대규모 유럽 정착민들이 채 도달하기도 전에 전염병으로 절멸했다. 태즈메이니아섬은 특히 타격이 컸는데 이주민 정착 초기 2,000~15,000명 수준이었던 애버리지니 인구가 1870년 무렵 거의 사라졌다. 인종학살이 가장 극심했던 1803-34년 사이 333명 애버리지니가 학살당한 것도 직접적 원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주민과 함께 들어온 매독 등 전염병에 저항력이 없었기 때문이며, 대다수는 이러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태즈메이니아 지역의 애버리지니는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30년사이(1803-1833) 영국 이주자들과 함께 들어온 질병과 인종탄압, 학살에 의해 인구가 약 5,000~15,000명에서 300명으로 급감하였다. 1896년 이후로 역사학자와 과학자, 인류학자들에 의해 애보리진에 대한 인구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트루가니니'라는 여성을 마지막으로 순수혈통은 모두 사라졌다.
내륙지방은 원주민이 정착민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여 이민 초기 약 3,000명가량 백인 이주자가 살해당했다고 추정되지만, 백인 이민자가 살해한 원주민의 수 또한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영국 식민지화는 1788년 뉴사우스웨일스주 보타니 베이에 퍼스트 플릿이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타스마니아(1803년), 빅토리아주(1803년), 퀸즐랜드주(1824년), 서호주(1826년), 그리고 남호주 식민지(1836년)에 정착지가 세워졌다.
6. 3. 1. 영향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 동남부 지역을 대영제국 영토로 선포하고 뉴사우스웨일스라고 이름붙인 이후 1788년 시드니를 중심으로 식민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인 이주로 인한 피해는 학살 및 그들과 같이 들어온 수두, 천연두, 인플루엔자, 홍역과 같은 전염병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없었던 애버리지니는 인구밀도 높은 동남부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큰 타격을 받아 인구가 급감하였고, 또한 이주민과 같이 들어온 성병 감염으로 말미암아 출생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민 초기 31만 5천~75만 명이던 원주민이 급감한 주요인은 천연두, 인플루엔자, 결핵과 같은 질병이며, 이 가운데 천연두에 걸려 병사한 원주민 수만 전 인구의 50%에 달했다고 추정된다.전염병과 성병, 그리고 탄압으로 말미암아 1788년과 1900년 사이 애보리진 인구 90%가 감소했다. 비교적 풍족했던 남부 호주의 애보리진의 경우 대규모 유럽 정착민들이 채 도달하기도 전에 전염병으로 절멸했다. 태즈메이니아섬은 특히 타격이 컸는데 이주민 정착 초기 2,000~15,000명 수준이었던 애버리지니 인구가 1870년 무렵 거의 사라졌다. 인종학살이 가장 극심했던 1803-34년 사이 333명 애버리지니가 학살당한 것도 직접적 원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주민과 함께 들어온 매독 등 전염병에 저항력이 없었기 때문이며, 대다수는 이러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태즈메이니아 지역의 애버리지니는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30년사이(1803-1833) 영국 이주자들과 함께 들어온 질병과 인종탄압, 학살에 의해 인구가 약 5,000~15,000명에서 300명으로 급감하였다. 1896년 이후로 역사학자와 과학자, 인류학자들에 의해 애보리진에 대한 인구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트루가니니'라는 여성을 마지막으로 순수혈통은 모두 사라졌다.
내륙지방은 원주민이 정착민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여 이민 초기 약 3,000명가량 백인 이주자가 살해당했다고 추정되지만, 백인 이민자가 살해한 원주민의 수 또한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질병의 유행, 예컨대 홍역, 천연두, 결핵 등이 즉각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19세기에 천연두는 원주민 사망의 주요 원인이었으며, 1840년대부터 "원주민"에 대한 예방 접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789년 천연두 유행으로 인해 다루그족의 최대 90%가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더욱이, 원주민들은 성병, 특히 매독과 임질에 감염되었다.
영국 식민지화의 또 다른 결과는 토지와 수자원의 유럽인에 의한 몰수였으며, 19세기와 20세기 초반 내내 시골 땅이 양과 소 방목으로 전환되면서 캥거루와 기타 식량 자원이 격감했다. 정착민들은 또한 원주민 여성에 대한 강간과 강제 매춘에도 가담했다.
일부 유럽인들은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 공동체에 살았다.
1834년에는 최초로 기록된 원주민 추적자들의 사용이 있었는데, 그들은 호주 지형을 탐색하고 사람들을 찾는 데 매우 능숙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860년대에는 타즈메이니아 원주민의 두개골이 두개골 얼굴 인류측정학 연구를 위해 국제적으로 특히 많이 찾아졌다. 1876년 사망한 타즈메이니아 원주민인 트루가니니의 유골은 사망 후 2년 만에 타즈메이니아 왕립 학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발굴되어 전시되었다. 원주민의 신체 일부를 매장을 위해 호주로 반환하려는 운동이 계속되고 있으며, 트루가니니의 시신은 1976년에 반환되어 화장되었고, 유골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뿌려졌다.
19세기와 20세기 대부분 동안,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들은 다양한 주 기반 보호법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러한 의회 법률은 원주민 보호관과 원주민 보호 위원회를 임명했는데, 그들의 역할은 호주 원주민들의 삶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임금은 보호관에 의해 통제되었고, 원주민들은 고용에서 비원주민들보다 적은 소득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원주민들이 식민지 개척자들에 의한 노예제의 희생자였으며, 태평양 섬 주민들과 함께 고향에서 납치되어 블랙버딩으로 알려진 관행을 겪었다. 1860년에서 1970년 사이에 보호 정책이라는 명목하에, 12세 어린이를 포함한 사람들이 끔찍한 조건에서 일하는 부동산에서 강제로 일했으며, 대부분은 임금을 받지 못했다. 진주 채취 산업에서 원주민들은 약 5파운드에 매입되었으며, 임신한 원주민 여성은 "폐의 공기 용량이 더 크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귀하게 여겨졌다. 로트네스트 섬의 원주민 전용 감옥에 수감된 원주민 수감자들은 대부분 날조된 혐의로 수감되었으며, 쇠사슬에 묶여 강제 노역을 했다. 1971년, 섬에서 373명의 원주민 남성이 무덤 없는 무덤에 묻힌 채 발견되었다. 2018년 6월까지 전 감옥은 휴가 숙박 시설로 사용되고 있었다.
1810년부터 원주민들은 교회와 국가가 운영하는 선교장으로 이주되었다. 원주민 인구를 격리하고 통제하려는 보호 정책 이후인 1937년, 연방 정부는 동화 정책으로 나아가기로 합의했다. 이 정책들은 "순혈이 아닌" 원주민들을 백인 사회에 통합시켜 "원주민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의 일환으로, 가정에서 강제로 격리되어 백인들에게, 시설이나 양부모 가정에 배치된 아동의 수가 증가했다.
6. 3. 2. 국경 전쟁과 학살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 동남부 지역을 대영제국 영토로 선포하고 뉴사우스웨일스라고 이름붙인 후, 1788년 시드니를 중심으로 식민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인 이주로 인한 피해는 학살 및 그들과 같이 들어온 수두, 천연두, 인플루엔자, 홍역과 같은 전염병에 의한 것이었다. 면역력이 없었던 원주민들은 인구밀도가 높은 동남부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큰 타격을 받아 인구가 급감했고, 성병 감염으로 출생률도 떨어졌다. 이민 초기 31만 5천~75만 명이던 원주민이 급감한 주요인은 천연두, 인플루엔자, 결핵과 같은 질병이며, 천연두로 사망한 원주민은 전체 인구의 50%에 달했다고 추정된다.[6]전염병, 성병, 탄압으로 1788년과 1900년 사이 원주민 인구의 90%가 감소했다. 남부 호주의 원주민들은 대규모 유럽 정착민들이 도착하기 전에 전염병으로 절멸했다. 태즈메이니아섬은 특히 피해가 컸는데, 이주민 정착 초기 2,000~15,000명 수준이던 원주민 인구가 1870년 무렵 거의 사라졌다. 1803-34년 사이 333명의 원주민이 학살당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주민과 함께 들어온 매독 등 전염병에 대한 저항력이 없었기 때문이다.[6]
태즈메이니아 지역의 원주민은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30년 사이(1803-1833) 영국 이주자들과 함께 들어온 질병과 인종탄압, 학살에 의해 인구가 약 5,000~15,000명에서 300명으로 급감하였다. 1896년 이후로 역사학자와 과학자, 인류학자들에 의해 원주민에 대한 인구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트루가니니'라는 여성을 마지막으로 순수혈통은 모두 사라졌다.[6]
내륙지방은 원주민이 정착민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여 이민 초기 약 3,000명가량 백인 이주자가 살해당했다고 추정되지만, 백인 이민자가 살해한 원주민의 수 또한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6]
식민지화 과정에서 대륙과 섬 전역에서 식민지 개척자들과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들 사이에 많은 갈등과 충돌이 있었다. 퀸즐랜드에서는 원주민들의 살해가 주로 민간인 "사냥" 단체와 정부 관리들이 이끄는 무장 원주민 남성 그룹인 원주민 경찰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들은 총으로 강제로 모집되어 원주민 저항을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의 도착과 함께 시작된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들에 대한 학살은 1930년대까지 계속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뉴캐슬 대학교의 린달 라이언 연구팀은 이러한 학살들을 지도에 표시하고 있다. 2020년 현재까지 약 500곳의 학살 장소를 지도에 표시했으며, 12,361명의 원주민이 사망하고 204명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약 140년 동안 최소 311건의 학살이 발생했다. 사회적 단위의 상당수를 한 번에 잃은 생존자들은 식량을 구하고, 번식하고, 의식 의무를 수행하고, 추가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능력이 줄어들면서 매우 취약해졌다.[6]
국경 전쟁 중 사망자 수를 추산하는 것은 기록 부족과 많은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 학살이 비밀로 유지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어렵다. 국경 전쟁에서 2만 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2000명의 식민지 개척자가 사망했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최소 4만 명의 원주민과 2000~2500명의 정착민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연구에 따르면 퀸즐랜드에서만 최소 6만 5000명의 원주민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6]
특히 태즈메이니아에서의 원주민 사망과 원주민 공동체로부터의 아동 강제 이동이 집단 학살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다. 린달 라이언이 21세기 인문학 센터에서 수행한 연구를 포함하여 원주민 학살 및 처우에 대한 광범위한 역사적 연구가 있었다. 국경 분쟁 데이터베이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정부의 인권 및 평등 기회 위원회(HREOC) 보고서인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 아동의 가족으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국가 조사"가 있다.[6]
인권 및 평등 기회 보고서에서 로널드 윌슨 판사의 분석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의 강제 이동 정책은 본질적으로 집단 학살적이었다. 윌슨은 라파엘 렘킨을 인용하여 집단 학살을 "민족 집단의 삶의 필수적인 기초를 파괴하고 집단 자체를 절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양한 행동의 조정된 계획"으로 정의했다. 그 목적은 "정치적 및 사회적 제도, 문화, 언어, 민족 감정, 종교 및 민족 집단의 경제적 존재의 붕괴, 그러한 집단에 속한 개인의 개인적 안전, 자유, 건강, 존엄성, 심지어 생명의 파괴"였다.[6]
윌슨은 "집단 학살은 실제 물리적 절멸 이외의 다른 수단으로도 저질러질 수 있다. 범죄의 다른 요소가 성립되는 경우, 아동의 강제 이송으로도 집단 학살이 저질러진다."라고 말한다. 그는 "실제 파괴가 발생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집단 학살을 저지르려는 음모와 집단 학살 시도는 모두 범죄이다."라고 지적한다. 또한 윌슨은 "집단 학살 협약 초안 작성 당시의 논의는 여러 목표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행위나 정책이 여전히 집단 학살적일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집단 학살 행위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집단의 계획된 절멸이 반감이나 증오에 의해서만 동기가 부여될 필요가 없다."...그리고 "합리적인 예견성...은 협약의 의도 요소를 확립하기에 충분하다."라고 밝혔다. 그는 "다른 집단으로 원주민 아동을 강제로 이송하여 그들의 문화와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채 무지하게 양육하는 정책은 적어도 1946년 12월 11일부터 구속력 있는 국제법 위반으로 '집단 학살적'이라고 적절하게 규정할 수 있다...이 관행은 거의 25년 동안 더 지속되었다."라고 결론지었다.[6]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원주민에 대한 광범위한 학살을 인정하는 기념물이 거의 없으며, 집단 학살로 묘사하는 기념물은 없다. 그러나 학살은 종종 오스트레일리아인들에 의해 지명으로 기록되었다. 예를 들어 뉴캐슬의 머더링 굴리, 레이크 웨이바의 머더링 크릭, 케언스 근처의 스컬 포켓과 스켈레톤 크릭, 마운트 몰로이 퀸즐랜드 근처의 라이플 크릭, 마운트 카바인 퀸즐랜드 근처의 스컬 라군, 윈튼 퀸즐랜드 근처의 스컬 홀, 배틀 캠프 로드, 로라 퀸즐랜드 동쪽의 레인지와 스테이션, 뉴사우스웨일스의 슬로터하우스 크릭(워털루 크릭) 등이 있다.[6]
6. 3. 3. 정치적 저항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 동남부 지역을 대영제국 영토로 선포하고 뉴 사우스 웨일스라고 이름붙인 이후 1788년 시드니를 중심으로 식민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인 이주로 인한 피해는 학살 및 그들과 같이 들어온 수두, 천연두, 인플루엔자, 홍역과 같은 전염병에 의한 것이었다.태즈메이니아 지역의 애버리지니는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30년사이(1803-1833) 영국 이주자들과 함께 들어온 질병과 인종탄압, 학살에 의해 인구가 약 5,000~15,000명에서 300명으로 급감하였다.
내륙지방은 원주민이 정착민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여 이민 초기 약 3,000명가량 백인 이주자가 살해당했다고 추정되지만, 백인 이민자가 살해한 원주민의 수 또한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들의 저항은 식민지 개척 시대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 1938년, 100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시드니에서 열린 최초의 호주 국경일 행사 중 하나에 대해 "원주민 회의"를 열고 그 날을 "항의와 애도의 날"로 지정하여 시위를 벌였다. 이 날은 현재 원주민들에 의해 "생존의 날" 또는 "침략의 날"로 불리기도 한다.
- 1963년 아른험 랜드의 이르칼라에 거주하는 욜뉴족은 자신의 땅에 대한 광업 권한 부여에 항의하며 호주 정부에 두 개의 나무껍질 청원서를 보냈다. 이르칼라 나무껍질 청원서는 연방법에 따라 인정받아야 할 전통적인 원주민 문서였다.
- 1972년 호주 국경일에, 최초의 "항의와 애도의 날" 이후 34년 만에, 원주민 활동가들은 오래된 연방 의사당 잔디밭에 원주민 토지 권리에 항의하는 원주민 텐트 대사관을 설치했다. 텐트 대사관은 1995년에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12년에 40주년을 맞이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고 응답받지 못한 항의 캠프가 되었다.
6. 4. 1871–1969: 도둑맞은 세대
1850년대 식민지화가 안정되자 애버리지니의 삶은 이주민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수렵 생활을 하던 원주민은 한곳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고, 특히 광산개발에 노동력을 제공하고서 음식을 받는 관계가 형성되었다.[20]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약 1,200여 명의 애버리지니가 군 복무를 하였고, 더 많은 군인이 필요하게 되자 그전까지 애버리지니의 군 복무를 제한하던 정책을 완화하였다.1920년대에는 애버리지니 인구가 급감하여 절멸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졌으나, 1930년대 전염병에 살아남고 면역력을 갖춘 원주민들의 출생률이 높아져 다시 인구는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00년부터 1972년까지 약 70여 년간 호주 정부와 교회는 원주민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애버리지니 부모로부터 아이들을 강제로 분리하여 백인 가정에 입양시켰다. 이러한 강제 입양을 당한 애버리지니들을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 또는 '도둑맞은 아이들'(Stolen Children)이라고 부르며,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20] 이들은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을 앓기도 하여 일부는 법정 소송을 통해 2007년 9월 1일 호주 역사상 최초로 보상 결정이 내려지는 성과를 얻었다.[20] 존 하워드 정권(~2007년)에서는 호주의 원주민 개화 정책이 이전 정권의 일이었다는 이유로 애버리지니에 대한 사과나 보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20] 그러나 2006년 11월 태즈메이니아 지역을 기점으로 애버리지니 후손들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이 이루어져 태즈메이니아 애버리지니 후예들만 약 40여 명이 향후 5백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불받기로 예정되었다.[20] 2007년 총선 승리로 집권한 케빈 러드 행정부는 2008년 2월 13일, 범정부 차원의 첫 번째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이를 연방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등, 더욱 적극적인 과거사 사죄 활동을 시작했다.[20]
6. 5. 20세기 초
1850년대 식민지화가 안정된 후, 애버리지니는 이주민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약 1,200여 명의 애버리지니가 군 복무를 했고, 더 많은 군인이 필요해지자 애버리지니 군 복무 제한 정책이 완화되었다. 1,000명 이상의 호주 원주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호주를 위해 싸웠다.1920년대에는 애버리지니 인구가 급감하여 절멸 우려가 있었으나, 1930년대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을 갖춘 원주민들의 출생률이 높아져 인구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1900년 당시 호주 원주민 인구는 약 93,000명으로 감소했다. 1933년에는 74,000명으로 최저치를 기록한 후에야 증가하기 시작했다.
1934년, 호주 원주민 다키야르(Dhakiyarr)는 백인 경찰 살해 혐의에 대해 고등법원에 항소하여 승소했다. 이 사건은 원주민 권리 문제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을 집중시켰다. 1938년, 영국 제1함대 도착 150주년은 시드니에서 열린 원주민 회의에서 애도의 날이자 시위로 기념되었다.
호주 원주민들은 1900년부터 72년까지 약 70여년간 원주민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호주 정부와 교회에 의해 정책적으로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백인 가정으로 입양당했다. 이러한 강제 입양을 당한 당시 애보리진들을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 또는 '도둑맞은 아이들'(Stolen Children)이라고 부르며,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20]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을 앓기도 하여 일부는 법정소송을 통해 2007년 9월 1일 호주 역사상 최초로 보상결정이 내려지는 성과를 얻었다.[20] 존 하워드 정권에서는 애보리진에 대한 사과나 보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2007년 총선에서 승리한 케빈 러드 행정부는 2008년 2월 13일, 범정부차원의 첫 번째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이를 연방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수백 명의 호주 원주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호주군에서 복무했다. 여기에는 토레스 해협 경보대와 북부 준주 특별 정찰 부대가 포함된다. 그러나 빅토리아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연금 권리와 군사 할당을 거부당했다.
6. 6. 20세기 후반
1960년대는 애버리지니의 권리 주장에 있어 중요한 시기였으며, 애버리지니 운동가들과 백호주 운동가들 간의 협력이 증가하던 시기였다. 1962년, 연방 법률에 따라 애버리지니에게 연방 선거 투표권이 보장되었는데, 이전에는 퀸즐랜드와 서호주에서 원주민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았었다. 1965년, 시드니 대학교(University of Sydney) 학생들은 뉴사우스웨일즈주 서부와 해안 지역 마을들을 버스로 순회하며 애버리지니의 건강과 생활 환경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이 프리덤 라이드는 애보리진이 직면한 사회적 차별을 부각하고 애보리진 스스로 차별에 저항하도록 격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호주 원주민들은 비원주민들보다 낮은 임금을 받았으며, 특히 퀸즐랜드의 애보리진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들은 보호관에 의해 소득이 압류되었고, 최소한의 금액만 받을 수 있었다. 1966년, 빈센트 링기아리(Vincent Lingiari)는 열악한 임금과 근무 환경에 항의하여 유명한 웨이브 힐 파업(Wave Hill walk-off)(구린지 파업)을 주도했는데, 이는 웨이브 힐 목장(Wave Hill Station)의 원주민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이후 폴 켈리(Paul Kelly (Australian musician))와 케브 카모디(Kev Carmody)의 노래 "작은 것들로부터 큰 것들이 자란다(From Little Things Big Things Grow)"의 주제가 되었다). 1999년 이후, 퀸즐랜드 주 정부(Queensland Government)는 퀸즐랜드 노동 조합 평의회(Queensland Council of Unions)의 압력을 받아 당시 받지 못한 임금을 애보리진에게 돌려주는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했다.
총리 해롤드 홀트(Harold Holt)가 제안한 획기적인 1967년 국민투표를 통해 연방 정부는 헌법 제51조(xxvi)을 수정하여 애보리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수 있게 되었고, 제127조를 폐지하여 선거구 대표 비율을 결정할 때 애보리진을 포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국민투표는 90.77%의 지지율로 통과되었다.
논란이 된 1971년 고브 토지 권리 사건(Gove land rights case)에서 블랙번 판사는 영국 식민지 이전 호주가 ''무주지(terra nullius))''였으며, 원주민 토지 소유권이라는 개념은 호주 법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1973년 우드워드 위원회 이후, 1975년 고프 휘틀럼(Gough Whitlam) 정부는 애보리진 토지 권리 법안을 작성했다. 이 법안은 이듬해 프레이저 정부(Fraser government) 하에서 ''1976년 애보리진 토지 권리법(Aboriginal Land Rights (Northern Territory) Act 1976)''으로 제정되어, 노던 준주에서 애보리진의 토지 권리 체계를 인정하고, NT의 애보리진이 전통적인 점유에 근거하여 토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1985년, 호주 정부는 울루루(Uluru)(에어스 록)의 소유권을 피잔자자라족(Pitjantjatjara people) 애보리진에게 반환했다. 1992년, 호주 고등법원(High Court of Australia)은 블랙번 판사의 판결을 뒤집고 마보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렸는데, 이전의 ''무주지''라는 법적 개념이 무효이며 호주 원주민 토지 소유권(native title in Australia)이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원주민들이 의회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971년, 네빌 보너(Neville Bonner)가 자유당 소속 퀸즐랜드 상원의원으로 호주 상원(Australian Senate)에 입성하여 연방 의회 최초의 원주민 의원이 되었다. 1년 후, 캔버라(Canberra)의 의사당 계단에 애보리진 천막 대사관(Aboriginal Tent Embassy)이 설립되었다. 1976년, 더글러스 니콜스(Douglas Nicholls) 경이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주지사로 임명되어 부왕직에 임명된 최초의 애보리진이 되었다. 2010년 총선에서 켄 와이엇(Ken Wyatt)이 자유당 소속으로 호주 하원(Australian House of Representatives)에 당선되어 최초의 원주민 하원의원이 되었다. 2016년 총선에서 린다 버니(Linda Burney)가 호주 노동당(Australian Labor Party) 소속으로 호주 하원(Australian House of Representatives)에 당선되어 두 번째 원주민 하원의원이자 최초의 여성 원주민 하원의원이 되었다. 그녀는 곧바로 그림자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스포츠에서는 에본 굴라공 코울리(Evonne Goolagong Cawley)가 1971년 세계 1위 테니스 선수가 되었고, 경력 동안 14개의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획득했다.

1973년, 아서 비트슨(Arthur Beetson)이 캥거루스를 처음 이끌면서 어떤 스포츠에서든 자국을 대표한 최초의 원주민 선수가 되었다. 1982년, 마크 엘라(Mark Ella)가 호주 국가 럭비 유니온 팀(Australia national rugby union team)의 주장이 되었다. 2000년, 애보리진 단거리 선수 캐시 프리먼(Cathy Freeman)이 시드니 2000년 하계 올림픽(2000 Summer Olympics) 개막식에서 올림픽 성화(Olympic flame)에 불을 붙였고, 대회에서 400미터(400 metres) 경주에서 우승했다. 2019년, 테니스 선수 애슐리 바티(Ashleigh Barty)가 세계 1위에 올랐다.
1984년, 전통적인 수렵 채집(hunter-gatherer) 방식으로 사막에서 생활하던 핀투피(Pintupi) 사람들인 핀투피 9명(Pintupi Nine)이 서호주 깁슨 사막(Gibson Desert)에서 발견되어 정착지로 이주했다. 그들은 호주에서 마지막으로 미접촉 부족(uncontacted peoples)으로 여겨진다.
이 기간 동안 연방 정부는 호주 원주민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중요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정책을 시행했다. 1990년에는 애보리진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 위원회(Aboriginal and Torres Strait Islander Commission)(ATSIC)라는 대표 기구가 설립되었다.
호주의 애버리지니들은 1900년부터 72년까지 약 70여년간 원주민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호주 정부와 교회에 의해 정책적으로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백인 가정으로 입양당했다. 이러한 강제 입양을 당한 당시 애보리진들을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 또는 '도둑맞은 아이들'(Stolen Children)이라고 부르며,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을 앓기도 하여 일부는 법정소송을 통해 2007년 9월 1일 호주 역사상 최초로 보상결정이 내려지는 성과를 얻었다.[20] 2007년까지 재임한 존 하워드 정권에서는 호주의 원주민개화정책이 이전 정권의 일이었다는 이유로 애보리진에 대한 사과나 보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2006년 11월 태즈메이니아 지역을 기점으로 애보리진의 후손들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이 이루어져 태즈메이니아 애보리진 후예들만 약 40여 명이 향후 5백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불받기로 예정되었다. 2007년 총선 승리로 집권한 케빈 러드 행정부는 2008년 2월 13일, 범정부차원의 첫 번째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이를 연방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등, 더욱 적극적인 과거사 사죄 활동을 시작했다.
20세기 후반, 호주의 문화 생활에서 애보리진 미술(Aboriginal art)과 애보리진 예술가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졌다.

6. 7. 화해
1991년, 호주 연방 정부는 화해를 촉진하기 위해 원주민 화해 평의회를 설립했다. 1995년에는 잃어버린 세대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고, 1997년에 제출된 최종 보고서인 "그들을 집으로 데려오기"는 모든 원주민 아동의 약 10%에서 33%가 가족과 분리되었을 것으로 추산했다.1900년부터 1972년까지 약 70여 년간 원주민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호주 정부와 교회는 정책적으로 원주민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하여 백인 가정으로 입양시켰다. 이러한 강제 입양을 당한 당시 애보리진들을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 또는 '도둑맞은 아이들'(Stolen Children)이라고 부르며,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20] 이들은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을 앓기도 하여 일부는 법정소송을 통해 2007년 9월 1일 호주 역사상 최초로 보상결정이 내려지는 성과를 얻었다.[20]
존 하워드 정권에서는 원주민개화정책이 이전 정권의 일이었다는 이유로 애보리진에 대한 사과나 보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나,[20] 1999년, 호주 의회는 총리 존 하워드가 원주민 상원의원 에이든 리지웨이와 협의하여 작성한 화해 결의안을 통과시켰는데, 이 결의안은 원주민 호주인에 대한 학대를 "우리 국가 역사상 가장 불명예스러운 장"으로 규정했지만, 하워드는 공식적인 사과를 거부했다. 2006년 11월 태즈메이니아 지역을 기점으로 애보리진의 후손들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이 이루어져 태즈메이니아 애보리진 후예들만 약 40여 명이 향후 5백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불받기로 예정되었다.[20]
2007년 총선 승리로 집권한 케빈 러드 행정부는 2008년 2월 13일, 범정부차원의 첫 번째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이를 연방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등, 더욱 적극적인 과거사 사죄 활동을 시작했다.[20] 케빈 러드 총리는 호주 연방 정부를 대표하여 잃어버린 세대에 의해 야기된 고통에 대해 호주 원주민에 대한 사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2021년, 스콧 모리슨(Scott Morrison) 총리가 이끄는 호주 정부는 과거 강제로 가정에서 격리된 원주민 아동인 Stolen Generations 구성원을 위한 배상 기금 조성을 발표했다. 이 배상 기금에는 피해자들에게 7만 5천 호주 달러의 일시불 지급이 포함되어 있으며, 호주 원주민이 직면한 심각한 불이익을 해소하기 위한 광범위한 계획의 일환이다.[9]
토지 정의와 배상을 위한 흑인과 원주민 공동체 간의 연대도 나타나고 있다. 원주민 주도의 Land Back 운동과 다양한 흑인 공동체 단체들은 토지 회복과 시민권 및 인권 침해에 대한 금전적 배상을 옹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10]
6. 8. 21세기
호주의 애버리지니들은 1900년부터 72년까지 약 70여년간 원주민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호주 정부와 교회에 의해 정책적으로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백인 가정으로 입양당했다. 이러한 강제 입양을 당한 당시 애보리진들을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 또는 '도둑맞은 아이들'(Stolen Children)이라고 부르며,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을 앓기도 하여 일부는 법정소송을 통해 2007년 9월 1일 호주 역사상 최초로 보상결정이 내려지는 성과를 얻었다.[20] 2007년까지 재임한 존 하워드 정권에서는 호주의 원주민개화정책이 이전 정권의 일이었다는 이유로 애보리진에 대한 사과나 보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2006년 11월 태즈메이니아 지역을 기점으로 애보리진의 후손들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이 이루어져 태즈메이니아 애보리진 후예들만 약 40여 명이 향후 5백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불받기로 예정되었다. 2007년 총선 승리로 집권한 케빈 러드 행정부는 2008년 2월 13일, 범정부차원의 첫 번째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이를 연방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등, 더욱 적극적인 과거사 사죄 활동을 시작했다.
2001년, 연방 정부는 캔버라에 화해의 장소(Reconciliation Place)를 조성했다. 2008년 2월 13일, 케빈 러드 총리는 존 하워드의 결정을 번복하고 호주 정부를 대표하여 잃어버린 세대(Stolen Generations) 구성원들에게 호주 원주민에 대한 사과(Apology to Australia's Indigenous peoples)를 발표했다.
호주 원주민 사무처(ATSIC)는 2004년 부패 혐의 속에서 호주 정부에 의해 폐지되었다.
2007년 북부 준주 국가 비상 대응(Intervention으로도 알려짐)은 존 하워드 총리 정부가 2007년 북부 준주(NT)의 원주민 사회에서 발생한 아동 학대 의혹을 조사한 ''신성한 어린 아이들'' 보고서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되었다. 정부는 준주 내 지정된 지역 사회에서 알코올을 금지하고, 필수품 구매를 위해 복지 급여의 일정 비율을 격리했으며, 지역에 추가 경찰과 의료 인력을 파견했고, 원주민 사회 접근 허가 시스템을 중단했다. 이러한 조치 외에도, 육군이 지역 사회에 배치되었고, 경찰 권한이 강화되었으며, 이후 소위 "서류 없는 체포" 법안으로 더욱 강화되었다.[7]
2010년, 유엔 특별 보고관 제임스 아나야는 비상 대응이 인종 차별적이며, 일부 측면이 "개인 자율성"을 제한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결과는 정부의 원주민 문제 담당 장관 제니 맥클린, 야당, 그리고 워렌 먼딘과 베스 프라이스와 같은 원주민 지도자들에 의해 비판받았다.
2011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북부 준주 원주민 사회의 실업, 학교 출석 및 등록, 알코올 남용, 지역 사회 안전 및 아동 보호, 식량 안보 및 주택 및 토지 개혁과 같은 주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더 강력한 미래 정책을 시행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이 정책은 국제앰네스티와 다른 단체들로부터 비상 대응 법의 "인종 차별적" 요소를 유지하고 연방 정부가 "원주민과 그들의 땅"을 계속 통제한다는 근거로 비판을 받았다.
2010년, 연방 정부는 원주민 지도자, 다른 법률 전문가 및 일부 국회의원(켄 와이엇 포함)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하여 연방 헌법에서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을 인정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2012년 1월 연방 정부에 보고된 위원회의 권고 사항에는 인종을 언급하는 헌법 조항( 제25조 및 제51(xxvi)조)의 삭제와 의미 있는 인정 및 차별로부터의 추가적인 보호에 관한 새로운 조항이 포함되었다. 그 후, 원주민의 헌법적 인정에 관한 국민투표 제안은 2013년에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
울룰루 성명서는 2017년 5월 26일 중앙 오스트레일리아 울룰루 근처에서 열린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 국민투표 협약 대표단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 성명서는 오스트레일리아 헌법에 "원주민 대표 기구(First Nations Voice)"를 설립하고 정부와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 간의 "합의 도출" 및 "진실 규명" 과정을 감독할 "마카라타 위원회(Makarrata Commission)"를 설립할 것을 촉구한다. 이 성명서는 원주민을 포함하도록 헌법을 변경한 1967년 국민투표를 언급한다.
6. 8. 1. 비상 대응/더 강력한 미래
2007년 북부 준주 국가 비상 대응(Intervention으로도 알려짐)은 존 하워드 총리 정부가 2007년 북부 준주(NT)의 원주민 사회에서 발생한 아동 학대 의혹을 조사한 ''신성한 어린 아이들'' 보고서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되었다. 정부는 준주 내 지정된 지역 사회에서 알코올을 금지하고, 필수품 구매를 위해 복지 급여의 일정 비율을 격리했으며, 지역에 추가 경찰과 의료 인력을 파견했고, 원주민 사회 접근 허가 시스템을 중단했다. 이러한 조치 외에도, 육군이 지역 사회에 배치되었고, 경찰 권한이 강화되었으며, 이후 소위 "서류 없는 체포" 법안으로 더욱 강화되었다.[7]
2010년, 유엔 특별 보고관 제임스 아나야는 비상 대응이 인종 차별적이며, 일부 측면이 "개인 자율성"을 제한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결과는 정부의 원주민 문제 담당 장관 제니 맥클린, 야당, 그리고 워렌 먼딘과 베스 프라이스와 같은 원주민 지도자들에 의해 비판받았다.
2011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북부 준주 원주민 사회의 실업, 학교 출석 및 등록, 알코올 남용, 지역 사회 안전 및 아동 보호, 식량 안보 및 주택 및 토지 개혁과 같은 주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더 강력한 미래 정책을 시행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이 정책은 국제앰네스티와 다른 단체들로부터 비상 대응 법의 "인종 차별적" 요소를 유지하고 연방 정부가 "원주민과 그들의 땅"을 계속 통제한다는 근거로 비판을 받았다.
6. 8. 2. 헌법 개정 제안
2010년, 연방 정부는 원주민 지도자, 다른 법률 전문가 및 일부 국회의원(켄 와이엇 포함)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하여 연방 헌법에서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을 인정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2012년 1월 연방 정부에 보고된 위원회의 권고 사항에는 인종을 언급하는 헌법 조항( 제25조 및 제51(xxvi)조)의 삭제와 의미 있는 인정 및 차별로부터의 추가적인 보호에 관한 새로운 조항이 포함되었다. 그 후, 원주민의 헌법적 인정에 관한 국민투표 제안은 2013년에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
울룰루 성명서는 2017년 5월 26일 중앙 오스트레일리아 울룰루 근처에서 열린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 국민투표 협약 대표단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 성명서는 오스트레일리아 헌법에 "원주민 대표 기구(First Nations Voice)"를 설립하고 정부와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 간의 "합의 도출" 및 "진실 규명" 과정을 감독할 "마카라타 위원회(Makarrata Commission)"를 설립할 것을 촉구한다. 이 성명서는 원주민을 포함하도록 헌법을 변경한 1967년 국민투표를 언급한다.
7. 신념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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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 전통 신앙
7. 1. 1. 원주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사회에서는 지식과 의사결정이 부족장들 사이에서 공유된다. 여행자들은 부족장의 인정을 구하고 현지 부족장들을 존중해야 했다. 이러한 관습은 오늘날 오스트레일리아의 공공 행사에서 점점 더 많이 실천되고 있다. 원주민 신앙 체계 내에서 "꿈의 시대" 또는 "드림타임(Dreamtime)"으로 알려진 형성 시대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대에 최초의 사람들(First Peoples)이라고 알려진 창조주 조상들이 땅을 가로질러 여행하며 지명을 붙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구전 전통과 종교적 가치는 땅에 대한 존경심과 이 꿈의 시대에 대한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꿈의 시대는 고대 창조의 시대이자 현재의 꿈의 시대 현실을 동시에 의미한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집단은 각자 고유한 신앙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문화들은 다양한 정도로 겹쳐져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했다. 주요 조상 영혼으로는 무지개 뱀, 바이암(Baiame), 디라웡(Dirawong), 번질(Bunjil)이 있다. 꿈의 시대에 담긴 지식은 다양한 이야기, 송라인, 춤, 의식을 통해 전해져 내려왔으며, 오늘날에도 지속적인 관계, 친족 책임 및 땅 관리의 틀을 제공한다.전통적인 치유자들(오스트레일리아 중부의 서부 사막 지역에서는 응강카리(Ngangkari)로 알려짐)은 남녀 모두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으며, 치유자나 의사 역할뿐만 아니라 중요한 꿈의 시대 이야기의 수호자 역할도 일반적으로 맡았다.
7. 1. 2. 토레스 해협 섬 주민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들은 자신들만의 전통적인 신앙 체계를 가지고 있다. 타가이(Tagai)에 대한 이야기는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들을 별과 연결된 바다 사람들로 묘사하며, 모든 것이 세상에서 제자리를 차지하는 질서 시스템을 보여준다. 일부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꿈의 시대(Dreaming)와 "에브리웬"(Everywhen) 개념과 유사한 신앙을 공유하며, 이는 구전 역사를 통해 전해져 내려온다.7. 2. 식민지화 이후
기독교와 유럽 문화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종교와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많은 식민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들은 원주민 문화와 종교의 상실을 촉진하는 동시에 유지에도 기여했다. 노던 준주 헤르만스부르크와 애들레이드의 필타우들리와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선교사들의 활동이 후대의 언어 부흥의 기반을 마련했다. 독일 선교사 크리스티안 타이켈만과 쉬어만은 애들레이드로 가서 현지 카우르나 사람들에게 오직 그들 자신의 언어로만 가르치고 그 언어로 교과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일부 선교사들은 영어로만 가르쳤고, 일부 기독교 선교 단체들은 정부의 명령에 따라 부모에게서 격리된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 아이들의 배치에 관여했으며, 따라서 잃어버린 세대에 연루되어 있다.1788년 이후 기독교인들의 원주민 문제 개입은 상당히 진화했다. 유럽인들이 대륙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게 되면서 19세기에 교회들은 원주민들 사이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고, 결국 대다수의 인구가 개종했다. 시드니의 첫 번째 가톨릭 대주교인 존 베드 폴딩(John Bede Polding)과 같은 식민지 성직자들은 원주민의 권리와 존엄성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2000년경 많은 교회와 교회 단체들은 원주민 문화에 대한 존중 부족과 원주민들의 땅 빼앗김에 대한 불의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소수의 원주민들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호주 내륙을 탐험하고 개척하기 위해 데려온 "아프간" 낙타 사육사와의 혼인을 통해 이슬람교를 따르게 되었다.
1870년대부터 기독교가 토레스 해협 제도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오늘날에도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들 사이에서 강하게 남아 있다. 사무엘 맥퍼레인 목사가 이끈 런던 선교회는 1871년 7월 1일 에루브 섬(Darnley Island)에 도착하여 이 지역 최초의 기지를 세웠다. 섬 주민들은 이를 "빛의 도래"라고 부르며, 모든 섬 공동체는 매년 7월 1일에 이 행사를 기념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도래가 사람들의 전통적인 신앙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문화는 새로운 종교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쳤고, 기독교의 하나님은 환영받았으며 새로운 종교는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에 통합되었다.
7. 2. 1. 원주민
1788년 이후 기독교인들의 원주민 문제 개입은 상당히 진화했다. 유럽인들이 대륙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게 되면서 19세기에 교회들은 원주민들 사이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고, 결국 대다수의 인구가 개종했다. 시드니의 첫 번째 가톨릭 대주교인 존 베드 폴딩(John Bede Polding)과 같은 식민지 성직자들은 원주민의 권리와 존엄성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2000년경 많은 교회와 교회 단체들은 원주민 문화에 대한 존중 부족과 원주민들의 땅 빼앗김에 대한 불의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소수의 원주민들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호주 내륙을 탐험하고 개척하기 위해 데려온 "아프간" 낙타 사육사와의 혼인을 통해 이슬람교를 따르게 되었다.
7. 2. 2. 토레스 해협 섬 주민
1870년대부터 기독교가 토레스 해협 제도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오늘날에도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들 사이에서 강하게 남아 있다. 사무엘 맥퍼레인 목사가 이끈 런던 선교회는 1871년 7월 1일 에루브 섬(Darnley Island)에 도착하여 이 지역 최초의 기지를 세웠다. 섬 주민들은 이를 "빛의 도래"라고 부르며, 모든 섬 공동체는 매년 7월 1일에 이 행사를 기념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도래가 사람들의 전통적인 신앙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문화는 새로운 종교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쳤고, 기독교의 하나님은 환영받았으며 새로운 종교는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에 통합되었다.7. 3. 최근 인구 조사
2016년 기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798,365명으로 호주 인구의 약 3.3%를 차지한다. 2011년 인구조사에서는 495,757명은 호주 원주민(어보리진), 31,407명은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 21,206명은 양쪽에 모두 속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오늘날에는 호주의 다른 인종들처럼 뉴사우스웨일스주와 퀸즐랜드 주 등 동부 해안에 가장 많이 거주하며 두 주에서 인구의 약 2-5%를 차지한다. 한편 원주민 인구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노던 테리토리로서, 이곳에서 인구의 약 30%가 원주민이다.오늘날 원주민은 대부분 영어를 구사하나, 음운, 문법, 어휘 면에서 원주민 언어의 영향을 받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영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2016년 호주 인구 조사에 따르면, 원주민과 비원주민 인구의 종교 분포는 크게 유사하여 54%(비원주민 55% 대비)가 기독교 신앙이라고 응답했으며, 2% 미만이 전통적인 신앙을 종교로 보고했고, 36%는 무종교라고 응답했다. 2001년 이후 무종교라고 응답한 원주민의 비율은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2016년에는 36%에 달했다. 호주 원주민 649,171명 중 347,572명이 어떤 형태의 기독교에 귀속된다고 밝혔으며, 이 수치에서 토레스 해협 주민의 비율이 원주민보다 더 높았다. 7,773명이 전통적인 신앙을, 1,511명이 이슬람교를 보고했으며, 다른 종교들은 각각 1,000명 미만이었다. 그러나 해당 질문은 선택 사항이었으며, 48,670명은 응답하지 않았고, 거의 4,000명은 "불충분하게 기술됨"으로 보고되었다. 2006년 인구 조사에서는 원주민 인구의 73%가 기독교 교파에 귀속된다고 응답했고, 24%는 무종교라고 응답했으며, 1%는 호주 원주민 전통 종교에 귀속된다고 응답했다.
8. 문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문화는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예술, 음악, 춤, 의식, 문학, 영화, 텔레비전, 극장 등을 포함한다.
예술오스트레일리아에는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애보리지널 아트(Aboriginal art) 전통이 있으며, 가장 잘 알려진 형태는 오스트레일리아 암각화와 나무껍질 그림이다. 애보리지널 아트의 증거는 적어도 3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대륙 전역에서 고대 암각화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울루루와 카카두 국립공원(노던 테리토리)과 같은 국립공원, 시드니의 쿠-링가이 체이스 국립공원과 같은 도시 지역의 보호 공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드니 암각화는 5000년에서 200년 전의 것이다. 서호주의 무루주가는 2007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동굴 벽화는 라스코와 알타미라(유럽의 구석기 시대 후기 유적)와 비교할 만하며, 애보리지널 아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속적인 예술 전통으로 여겨진다. 세 가지 주요 지역 양식이 있는데, 중앙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 킴벌리, 빅토리아에서 발견되는 동심원, 호, 점으로 유명한 기하학적 양식, 퀸즐랜드에서 발견되는 단순한 구상 양식, 그리고 아른험 랜드와 킴벌리에서 발견되는 복잡한 구상 양식이다. 이러한 디자인은 꿈의 시대의 영성과 관련된 의미를 지닌다. 그림은 황토로 만든 페인트로 흙색으로 그려졌으며, 이러한 황토는 의식 목적으로 신체를 칠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현대에는 수채화 그림인 헤르만스부르크 화파와 아크릴 파푸냐 툴라 "점묘화" 운동을 포함한 여러 애보리지널 아트 양식이 발전했다. 주목할 만한 애보리지널 예술가로는 윌리엄 바락(1824년경–1903)과 앨버트 나마티자(1902–1959)가 있다.
1970년대 이후로 원주민 예술가들은 아크릴 페인트를 사용해 왔으며, 서부 사막 미술 운동과 같은 양식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20세기 미술 운동이 되었다.
호주 국립미술관은 전통 조각과 모자로 유명한 토레스 해협 제도의 작품을 포함하여 많은 원주민 예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애보리지널 아트는 마가렛 프레스턴(1875–1963)과 엘리자베스 두랙(1915–2000)과 같은 많은 비원주민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음악, 춤, 의식음악과 무용은 수천 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개인적, 집단적 역사를 통해 오늘날까지 그들의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의례적 관습의 필수적인 부분을 형성해왔다. 1950년경, 인류학자 A. P. 엘킨이 아넘랜드에서 원주민 음악을 녹음하면서 원주민 음악에 대한 최초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다양한 원주민들은 독특한 악기와 음악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디저리두는 동부 킴벌리 지역과 아넘랜드(예: 욜뉴족)의 원주민 남성들이 연주했다. 벌로아러와 클랩스틱은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송라인은 원주민 문화의 꿈의 시대와 관련이 있으며, 구전 전승과 겹친다. 코로보리는 다양한 종류의 노래, 춤, 집회 및 모임을 포괄하는 공연의 일반적인 용어이다.
원주민 음악가들은 록 음악의 하위 장르를 창출하고 팝 및 기타 주류 스타일 음악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현대 음악 스타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힙합 음악은 일부 원주민 언어를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브리즈번의 원주민 공연 예술 센터는 연기, 음악, 무용을 가르치고 있으며, 방가라 댄스 극장은 명성 있는 현대 무용단이다.
토레스 해협 제도민들에게 노래와 춤은 그들의 "문학" 즉 "토레스 해협 생활 방식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다. 토레스 해협 제도민들은 노래와 춤을 통해 구전 역사를 보존하고 전달한다. "...춤은 설명적인 자료 역할을 하고, 물론 춤추는 사람 자신이 이야기꾼이다." (Ephraim Bani영어, 1979).
문학식민지 시대 이전에는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여러 언어에 대한 서면 형식이 없었다. 1796년 벤넬롱이 아서 필립 주지사에게 쓴 편지는 원주민이 영어로 쓴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작품이다. 1963년의 역사적인 이르칼라 나무껍질 청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의회에서 인정받은 최초의 전통적인 원주민 문서이다.
데이비드 우나이폰은 최초의 원주민 출판 작가로, 그의 저서 ''원주민의 전설 이야기''(1924–1925)에서 원주민 신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제공했다. 우드제루 누누칼은 원주민 작가가 쓴 최초의 시집인 ''우리는 간다''(1964)를 출판했다. 샐리 모건의 소설 ''내 자리''(1987)은 원주민 이야기를 더 넓은 독자층에 알린 획기적인 회고록으로 여겨졌다. 극작가 잭 데이비스와 케빈 길버트의 재능 또한 인정받았다. 신성한 것부터 일상적인 것까지 다양한 전통적인 노래 시를 포함한 원주민 시인들의 시는 20세기 후반부터 출판되었다.
21세기에 두각을 나타내는 작가로는 알렉시스 라이트, 마일즈 프랭클린 상을 두 번 수상한 킴 스콧, 타라 준 윈치, 멜리사 루카센코, 극작가이자 코미디 작가 나키아 루이, 시인 이벳 홀트, 그리고 대중 소설 작가 애니타 하이스가 있다. 마샤 랭턴과 노엘 피어슨은 오스트레일리아 문학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현대 작가들이다. 언론인 스탠 그랜트는 현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원주민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몇몇 논픽션 작품을 집필했으며, 브루스 패스코는 픽션과 논픽션 작품 모두를 집필했다. 오스트릿의 ''블랙워즈'' 프로젝트는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주민 작가와 이야기꾼에 대한 포괄적인 목록을 제공한다. 원주민 언어 생생 기록 보관소에는 노던 테리토리의 전통 언어로 쓰여진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영화 및 텔레비전오스트레일리아 영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의식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최초로 촬영된 주제 중 하나였다. 인류학자 볼드윈 스펜서와 F.J. 길렌은 1900년부터 1903년까지 중앙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원주민 무용가들의 영화를 촬영했다.
제다(1955)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처음으로 컬러 영화로 촬영된 장편 영화이자, 원주민 배우(응가를라 쿠노스와 로버트 투다왈리)가 주연을 맡은 최초의 영화이며, 칸 영화제에 출품된 최초의 영화였다. 1971년의 워크어바웃은 오스트레일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국 영화였으며, 많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관련 영화의 선구자였고 데이비드 굴필릴을 영화 관객들에게 소개했다. 짐미 블랙스미스의 노래(1976)는 프레드 셰피시가 감독하고 토마스 케네일리의 책을 원작으로 한 수상 경력이 있는 역사 드라마로, 원주민 부시레인저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피터 위어의 1977년 미스터리 드라마 마지막 물결은 굴필릴이 출연하고 원주민의 신앙과 문화 요소를 특징으로 하며, 여러 AACTA 상을 수상했다.
1990년대부터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관련된 영화가 늘어났으며, 닉 파슨의 영화 데드 하트(1996)에는 어니 딩고와 브라이언 브라운이 출연했고, 롤프 드 헤어의 추적자(2002)에는 개리 스위트와 데이비드 굴필릴이 출연했고, 필립 노이스의 토끼 울타리(2002)가 있다.
롤프 드 헤어 감독의 2006년 영화 텐 카누의 사운드트랙은 욜뉴 마타 언어 그룹의 방언으로 전적으로 촬영되었으며, 주요 버전에는 자막과 데이비드 굴필릴의 영어 해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는 2006 칸 영화제에서 언 세르탱 르가르 특별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토레스 해협 원주민 배우 애런 파아오소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2012년 TV 드라마 시리즈 해협은 토레스 해협 제도에서 부분적으로 촬영되었으며, 파아오소와 지미 바니(마부이아그 섬 출신), 그리고 파푸아뉴기니 배우들이 출연했다. 파아오소와 바니가 출연하는 다큐멘터리 TV 시리즈 블루 워터 엠파이어(2019년 방영)는 식민지 이전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토레스 해협 제도의 역사를 보여준다.
21세기에는 많은 원주민 배우, 감독, 제작자 등이 영화와 TV 시리즈 제작에 참여했다. 아이반 센, 레이철 퍼킨스(블랙펠라 필름즈사), 애런 페더슨, 데보라 메일먼, 워릭 손튼, 리아 퍼셀, 샤리 세벤스, 샐리 라일리, 루크 캐롤과 미란다 탭셀, 웨인 블레어, 그리고 트리샤 모튼-토마스 등이 있으며, 그중 많은 사람들이 상 후보 및 수상에 잘 알려져 있다. 스윗 컨트리(2017), 탑 엔드 웨딩(2019)과 TV 시리즈 클레버맨과 토탈 컨트롤(2019)은 모두 원주민 영화 제작자들이 제작하고 원주민 주제를 다룬 영화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일부는 상을 수상했다.
스케치 코미디 TV 시리즈 블랙 코미디의 세 번째 시리즈는 나키아 루이, 아담 브릭스, 스티븐 올리버 등이 공동 집필하고 많은 원주민 배우들이 출연하며, 2020년 1월 방영을 시작했다.
극장오스트레일리아의 극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극장#원주민 극장 문서를 참고하라.
8. 1. 예술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애보리지널 아트(Aboriginal art) 전통이 있으며, 가장 잘 알려진 형태는 오스트레일리아 암각화와 나무껍질 그림이다. 애보리지널 아트의 증거는 적어도 3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대륙 전역에서 고대 암각화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중 일부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울루루와 카카두 국립공원(노던 테리토리)과 같은 국립공원에 있지만, 시드니의 쿠-링가이 체이스 국립공원과 같이 도시 지역의 보호 공원에서도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시드니 암각화는 5000년에서 200년 전의 것이다. 서호주의 무루주가는 2007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나이와 풍부함 측면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동굴 벽화는 라스코와 알타미라(유럽의 구석기 시대 후기 유적)와 비교할 만하며, 애보리지널 아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속적인 예술 전통으로 여겨진다. 세 가지 주요 지역 양식이 있다. 중앙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 킴벌리, 빅토리아에서 발견되는 동심원, 호, 점으로 유명한 기하학적 양식; 퀸즐랜드에서 발견되는 단순한 구상 양식; 그리고 아른험 랜드와 킴벌리에서 발견되는 복잡한 구상 양식이다. 이러한 디자인은 일반적으로 꿈의 시대의 영성과 관련된 의미를 지닌다. 그림은 일반적으로 황토로 만든 페인트로 흙색으로 그려졌으며, 이러한 황토는 의식 목적으로 신체를 칠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현대에는 수채화 그림인 헤르만스부르크 화파와 아크릴 파푸냐 툴라 "점묘화" 운동을 포함한 여러 애보리지널 아트 양식이 발전했다. 주목할 만한 애보리지널 예술가로는 윌리엄 바락(1824년경–1903)과 앨버트 나마티자(1902–1959)가 있다.
1970년대 이후로 원주민 예술가들은 아크릴 페인트를 사용해 왔으며, 서부 사막 미술 운동과 같은 양식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20세기 미술 운동이 되었다.
호주 국립미술관은 전통 조각과 모자로 유명한 토레스 해협 제도의 작품을 포함하여 많은 원주민 예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애보리지널 아트는 마가렛 프레스턴(1875–1963)과 엘리자베스 두랙(1915–2000)과 같은 많은 비원주민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8. 2. 음악, 춤, 의식
음악과 무용은 수천 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개인적, 집단적 역사를 통해 오늘날까지 그들의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의례적 관습의 필수적인 부분을 형성해왔다. 1950년경, 인류학자 A. P. 엘킨이 아넘랜드에서 원주민 음악을 녹음하면서 원주민 음악에 대한 최초의 연구가 시작되었다.다양한 원주민들은 독특한 악기와 음악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원주민들의 전형적인 악기로 널리 여겨지는 디저리두는 전통적으로 동부 킴벌리 지역과 아넘랜드(예: 욜뉴족)의 원주민 남성들이 연주했다. 벌로아러와 클랩스틱은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송라인은 원주민 문화의 꿈의 시대와 관련이 있으며, 구전 전승과 겹친다. 코로보리는 다양한 종류의 노래, 춤, 집회 및 모임을 포괄하는 공연의 일반적인 용어이다.
원주민 음악가들은 록 음악의 하위 장르를 창출하고 팝 및 기타 주류 스타일 음악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현대 음악 스타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힙합 음악은 일부 원주민 언어를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브리즈번의 원주민 공연 예술 센터는 연기, 음악, 무용을 가르치고 있으며, 방가라 댄스 극장은 명성 있는 현대 무용단이다.
토레스 해협 제도민들에게 노래와 춤은 그들의 "문학" 즉 "토레스 해협 생활 방식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다. 토레스 해협 제도민들은 노래와 춤을 통해 구전 역사를 보존하고 전달한다. "...춤은 설명적인 자료 역할을 하고, 물론 춤추는 사람 자신이 이야기꾼이다." (Ephraim Bani영어, 1979).
8. 3. 문학
식민지 시대 이전에는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여러 언어에 대한 서면 형식이 없었다. 1796년 벤넬롱이 아서 필립 주지사에게 쓴 편지는 원주민이 영어로 쓴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작품이다. 1963년의 역사적인 이르칼라 나무껍질 청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의회에서 인정받은 최초의 전통적인 원주민 문서이다.데이비드 우나이폰은 최초의 원주민 출판 작가로, 그의 저서 ''원주민의 전설 이야기''(1924–1925)에서 원주민 신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제공했다. 우드제루 누누칼은 원주민 작가가 쓴 최초의 시집인 ''우리는 간다''(1964)를 출판했다. 샐리 모건의 소설 ''내 자리''(1987)은 원주민 이야기를 더 넓은 독자층에 알린 획기적인 회고록으로 여겨졌다. 극작가 잭 데이비스와 케빈 길버트의 재능 또한 인정받았다. 신성한 것부터 일상적인 것까지 다양한 전통적인 노래 시를 포함한 원주민 시인들의 시는 20세기 후반부터 출판되었다.
21세기에 두각을 나타내는 작가로는 알렉시스 라이트, 마일즈 프랭클린 상을 두 번 수상한 킴 스콧, 타라 준 윈치, 멜리사 루카센코, 극작가이자 코미디 작가 나키아 루이, 시인 이벳 홀트, 그리고 대중 소설 작가 애니타 하이스가 있다. 마샤 랭턴과 노엘 피어슨은 오스트레일리아 문학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현대 작가들이다. 언론인 스탠 그랜트는 현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원주민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몇몇 논픽션 작품을 집필했으며, 브루스 패스코는 픽션과 논픽션 작품 모두를 집필했다. 오스트릿의 ''블랙워즈'' 프로젝트는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주민 작가와 이야기꾼에 대한 포괄적인 목록을 제공한다. 원주민 언어 생생 기록 보관소에는 노던 테리토리의 전통 언어로 쓰여진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8. 4. 영화 및 텔레비전
오스트레일리아 영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의식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최초로 촬영된 주제 중 하나였다. 인류학자 볼드윈 스펜서와 F.J. 길렌은 1900년부터 1903년까지 중앙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원주민 무용가들의 영화를 촬영했다.제다(1955)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처음으로 컬러 영화로 촬영된 장편 영화이자, 원주민 배우(응가를라 쿠노스와 로버트 투다왈리)가 주연을 맡은 최초의 영화이며, 칸 영화제에 출품된 최초의 영화였다. 1971년의 워크어바웃은 오스트레일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국 영화였으며, 많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관련 영화의 선구자였고 데이비드 굴필릴을 영화 관객들에게 소개했다. 짐미 블랙스미스의 노래(1976)는 프레드 셰피시가 감독하고 토마스 케네일리의 책을 원작으로 한 수상 경력이 있는 역사 드라마로, 원주민 부시레인저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피터 위어의 1977년 미스터리 드라마 마지막 물결은 굴필릴이 출연하고 원주민의 신앙과 문화 요소를 특징으로 하며, 여러 AACTA 상을 수상했다.
1990년대부터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관련된 영화가 늘어났으며, 닉 파슨의 영화 데드 하트(1996)에는 어니 딩고와 브라이언 브라운이 출연했고, 롤프 드 헤어의 추적자(2002)에는 개리 스위트와 데이비드 굴필릴이 출연했고, 필립 노이스의 토끼 울타리(2002)가 있다.
롤프 드 헤어 감독의 2006년 영화 텐 카누의 사운드트랙은 욜뉴 마타 언어 그룹의 방언으로 전적으로 촬영되었으며, 주요 버전에는 자막과 데이비드 굴필릴의 영어 해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는 2006 칸 영화제에서 언 세르탱 르가르 특별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토레스 해협 원주민 배우 애런 파아오소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2012년 TV 드라마 시리즈 해협은 토레스 해협 제도에서 부분적으로 촬영되었으며, 파아오소와 지미 바니(마부이아그 섬 출신), 그리고 파푸아뉴기니 배우들이 출연했다. 파아오소와 바니가 출연하는 다큐멘터리 TV 시리즈 블루 워터 엠파이어(2019년 방영)는 식민지 이전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토레스 해협 제도의 역사를 보여준다.
21세기에는 많은 원주민 배우, 감독, 제작자 등이 영화와 TV 시리즈 제작에 참여했다. 아이반 센, 레이철 퍼킨스(블랙펠라 필름즈사), 애런 페더슨, 데보라 메일먼, 워릭 손튼, 리아 퍼셀, 샤리 세벤스, 샐리 라일리, 루크 캐롤과 미란다 탭셀, 웨인 블레어, 그리고 트리샤 모튼-토마스 등이 있으며, 그중 많은 사람들이 상 후보 및 수상에 잘 알려져 있다. 스윗 컨트리(2017), 탑 엔드 웨딩(2019)과 TV 시리즈 클레버맨과 토탈 컨트롤(2019)은 모두 원주민 영화 제작자들이 제작하고 원주민 주제를 다룬 영화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일부는 상을 수상했다.
스케치 코미디 TV 시리즈 블랙 코미디의 세 번째 시리즈는 나키아 루이, 아담 브릭스, 스티븐 올리버 등이 공동 집필하고 많은 원주민 배우들이 출연하며, 2020년 1월 방영을 시작했다.
8. 5. 극장
오스트레일리아의 극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극장#원주민 극장 문서를 참고하라.9. 레크리에이션 및 스포츠
많은 전통적인 오락 활동이 부족마다 다양하게 존재했지만, 공통점도 많았다. 공을 이용한 놀이와 무기를 사용하는 놀이가 널리 행해졌다. 전통적인 축구 경기가 행해졌다는 방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중 마른 그룩은 주머니쥐과의 털가죽으로 만든 공을 차고 잡는 축구의 한 종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식 축구의 형성에 마른 그룩이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으며, 많은 원주민들이 현대식 경기를 즐긴다. 그래햄 파머, 개빈 왕가니, 아담 굿즈, 랜스 프랭클린 등이 유명한 원주민 출신 선수이며, 특히 굿즈는 2014년 올해의 호주인이 되기도 했다.
1868년 영국을 순회 공연한 원주민 크리켓 팀은 해외 원정을 간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 스포츠팀이었다. 크리켓 선수이자 오스트레일리아식 축구의 선구자인 톰 윌스는 어린 시절 배운 원주민 언어로 팀을 지도했고, 찰스 로렌스가 영국 원정에 동행했다. 팀의 스타 선수였던 조니 뮬라는 당대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에번 고올라공은 14개의 메이저 테니스 타이틀을 획득하며 세계 1위 여성 테니스 선수가 되었고, 애쉴리 바티 또한 세계 1위에 올라 메이저 단식 타이틀 3개를 획득했다. 캐시 프리먼은 올림픽, 세계 선수권 대회, 영연방 경기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단거리 선수이다. 라이오넬 로즈는 복싱에서 세계 타이틀을 획득했고, 아서 비트슨, 로리 데일리, 고든 탈리스는 럭비 리그에서, 마크 엘라는 럭비 유니온에서 오스트레일리아 국가대표팀 주장을 역임했다. 네이선 자와이와 패티 밀스는 미국 프로 농구에서 활약했다.
스포츠팀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식 축구의 원주민 올스타, 플라잉 부메랑, 세기의 원주민 팀과 럭비 리그의 원주민 올스타, NSW 쿠리 녹아웃, 무리 럭비 리그 팀이 있다.
10. 현대적 문제
10. 1. 격차 해소
오늘날까지도 피랍 세대로 알려진 호주 원주민 아동들의 강제 이주는 심리, 건강 및 웰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주 당한 아동과 그들의 부모뿐만 아니라 후손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아동들이 그룹홈이나 입양 가정에서 학대를 당했다. 정신적, 신체적, 성적 학대를 포함하여 가족과 문화까지 빼앗겨 구전 문화가 단절되고 많은 것이 상실되었다.개선이 있었지만, 오늘날 호주 원주민들은 비원주민 인구와 비교했을 때 많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건강(더 짧은 평균 수명 및 높은 유아 사망률 포함), 낮은 교육 수준 및 고용률, 대를 거듭하는 외상, 높은 수감률, 약물 남용 및 정치적 대표성 부족 등이 포함된다.
몇 가지 인구 통계적 사실은 원인이자 결과로서 이러한 문제와 관련이 있다. 2016년 호주 인구 조사에서 원주민 인구의 33% 이상이 주요 도시에 거주한 반면, 비원주민 인구의 약 75%가 주요 도시에 거주했다. 호주 원주민 인구는 출산율과 사망률이 높아 비원주민 인구보다 훨씬 젊으며, 추정 중위 연령은 21세(비원주민 37세)이다.
2008년에 만들어지고 2019년 7월부터 호주 원주민청에서 조정하는 연방 정부의 격차 해소 전략은 원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분야를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2019년 목표 초안은 2018년 12월 호주 정부협의회(COAG)에서 만들어졌으며, 가족, 아동 및 청소년, 건강, 교육, 경제 개발, 주택, 사법 (청소년 사법 포함), 토지와 물, 시스템 간 우선 순위 등의 영역에 있다.
10. 2. 건강
차별, 교육 및 고용 부족(그리고 그에 따른 소득)과 같은 사회문화적 요인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현대의 불이익은 식민지배와 그 지속적인 영향과 관련이 있다.연속적인 인구 조사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일반 인구보다 더 높은 비율의 신장 질환, 여러 전염병(결핵 및 C형 간염 바이러스 등), 2형 당뇨병, 호흡기 질환, 열악한 정신 건강 및 기타 질병을 경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원주민 오스트레일리아인의 평균 수명을 정확하게 산출하기는 어려우며, 2013년 연구에서는 국가 원주민 개혁 정책인 '격차 해소(Closing the Gap)'를 언급하며, 평균 수명 추정 방법의 차이로 인해 격차의 규모를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2016-17년 기준으로 애보리진과 토레스 해협 주민의 평균 수명은 남성 71.6세, 여성 75.6세였다.
2014-6년 영아 사망률(0~4세)은 비원주민 어린이보다 두 배나 높았다. 정신 건강, 자살, 자해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이며, 2015년 자살률은 비원주민 인구의 두 배에 달했고, 젊은 세대의 정신 건강 문제는 증가하고 있다. 피랍세대 사이에서는 불안,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및 자살이 빈번하게 발생하며, 이로 인해 불안정한 양육 환경과 가족 상황이 초래된다.
많은 원주민 공동체는 합법적이거나 불법적인 약물의 약물 남용과 관련된 다양한 건강, 사회 및 법적 문제를 겪고 있으며, 알코올 남용, 휘발유 흡입, 메탐페타민("얼음") 및 대마초와 같은 불법 약물 사용, 그리고 담배 흡연 등이 포함된다. 담배 사용은 원주민과 비원주민 호주인 간 질병 부담 격차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요인으로 추산되며, 원주민은 비원주민보다 매일 담배를 피울 가능성이 2.5배 더 높다.
2012~2013년 원주민 호주인은 비원주민보다 알코올을 완전히 금주할 가능성이 1.6배 더 높았다. 태아 알코올 증후군이 문제가 되어 왔지만, 임신부의 음주율은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절반으로 감소했다.
휘발유 흡입은 일부 원격 지역 사회에서 문제가 되어 왔다. 퀸즐랜드 대학교(UQ)가 2018년에 실시한 종단 연구는 여러 지역 사회에서 휘발유 흡입 인구가 감소했음을 보고했는데, 이는 2005년 새로운 저 방향족 휘발유인 오팔이 유통된 것과 관련이 있다.
2018년 UQ 연구는 또한 알코올과 대마초가 가장 우려되는 약물이라고 보고했다. "얼음"은 여러 지역 사회에서 발견되었지만,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시적인 사용만 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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